KBS 저널 (1998년)

<표민수 PD '거짓말' 제작일기 >
[거짓말]로만 두 달 살았다...

PC통신 드라마 네트에 '거짓말방'이 아직도 남아있다.
드라마는 종방되었지만 아직도 하루 한번 이상 컴퓨터를 켜서 그 방에 들른다..
거기서 만날 수 있는 사람들. 나는 그 사람들을 사랑한다.. [거짓말]을 좋아해줘서가 아니었다.. 다만 그 방에서만 만날 수 있는 묘한 사랑이 있어서였다.
[거짓말]은 작년 5월 처음 이야기가 나왔다..
그리고 노희경 작가와 지난 9월부터 고민을 시작했다.
방송종료까지 우리는 거의 9개월을 [거짓말]에 매달렸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란 무엇일까라는 화두를 가지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작품을 정말 사랑하는 사람들과 만나고 싶었다.
[거짓말]을 사랑하는 성우와 준희와 은수를 사랑하는 사람 배우들을 이 작품에 초정하고 역할을 이야기할 때도 그랬다..
배종옥, 유호정, 이성재, 윤여정, 주현, 김상중, 김태우, 추상미씨, 이 작품은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했으면, 이 작품을 하고 나서 준희의 대사처럼 정말 사랑이 있다고 믿었으면 한다고...
그리고 작업현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사랑이 있는 것으로 믿어 주었다.
촬영감독인 강장수선배, 이용호조명감독이 사랑을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늘 우리는 공부를 했다. 촬영 후에도 이야기를 했고 새벽에 만나서도 '거짓말'을 이야기했다.
첫 회 방송후 [거짓말]의 시청률은 보잘 것이 없었다.. 그 시청률을 알고 촬영을 시작하려할 때 카메라감독, 조명감독, 김상중씨가 웃으면서 더 열심히 해보자구 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거짓말]은 거짓말같이 시청률에 전혀 신경쓰지 않고 제작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드라마 제작국에서도 그랬고, 작가와 연기자들도 그랬고, 스태프들도 그래서 그냥 나도 그랬다..
아무도 시청률을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제작기간 동안 [거짓말]이외의 세상은 없었으니까.
소수의 시청자가 [거짓말]을 사랑했고, 그 소수의 사람들이 격려를 해 주었다.
PC통신에서 많은 이야기를 전해 주였고 많은 격려를 해 주었다..
그 사랑이 있었기에 [거짓말]은 20회를 마쳤다. 근데 아직도 [거짓말]은 끝나지 않았다.. 통신에 참여했던 마니아들이 [거짓말]소모임을 만들었고, 아직도 통신에는 하루에 몇 십개의 이야기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래서 성우와 준희가 그 화랑에서, 그 사무실에서 마주 보고 있고 은수가 지하 작업실에서 안경을 끼고 작업을 하고 있는 듯하다..
버릇처럼 '거짓말방'을 들르면서 머리 속에서 이 드라마를 지우고 있다.
그런데 가슴 속에서는 오래 남아 있을 것 같다..


<노희경 작가 '거짓말' 집필기>
내가 정말 [거짓말]을 잊을 수 있을까?

사랑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원한 것도. 그가 원했던 것도 아닌데 끝나버린 사랑을 했던 기억이 있다..
참 많이 아팠었다.. 그의 학교 앞을, 집 앞을 오래 서성였다..
가끔 친구들 말에 의하면 그 역시 나처럼 오래 내 주위를 서성였다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날 수 없었다.
드라마 [거짓말]이 종방됐다.
나는 지금 미워서 헤어진게 아니라, 인연이 다해서 헤어진 그 사랑처럼 [거짓말]의 종방을 맞고 아프다..
사랑할 때 자만하고 끝난 뒤에야 자신의 미흡함을 깨닫듯 스스로 작품에 소홀했던 부분들을 문득 문득 발견하면서, [거짓말]을 못잊고 옛날 그의 집과 학교 앞을 서성였듯 통신에 접속하고 드라마에 관한 기사를 읽는다.
봐도봐도 질리지 않았던 애인을 상기하며 천원짜리 비디오테이프에 녹화된 드라마를 보고 또 본다. 그러다 순간 꺼버린다. 우린 이제 인연이 다 했다. 그것을 안다. 다시 만날수 없으리라.
서른 셋의 나이에 남편도 없고, 아이도 없고, 연애도 하지 않은 내게 드라마를 쓰는 일이란 감히 삶의 전부다.
십 개월 동안 [거짓말]을 몸 안에 일부처럼 사랑하면서, 연애하는 기분이었다.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컴퓨터를 켜면, 우습게도 성우 준희 은수를, 영희 현철을, 동진 세미 장어를 만난다는 것이 설레었었다.
그리고 글쓰는 내내 투정하지 않았다. 힘들어 하지 않았다.
사랑은 겸허해야 한다고 믿은 때문이다. 사랑하는 마음으로도 감사했다.
[거짓말]은 내가 지금껏 쓴 것 중(대부분이 그랬지만) 가장 시청률이 저조한 드라마였다.
그런데 난 왜 이 드라마를 그렇게 사랑했던 걸가?
해답이 찾아지지 못한다. 해답을 찾기 위해 그 과정을 거슬러 올라가 본다..
[거짓말]을 만든 사람들은 이뻤다.
감독은 깊은 눈으로 작품을 이해했고, 이해되지 않을 때는 화내지 않고 고민했다.
그가 고민하여 고수머리를 엄지와 검지로 펴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는 일을 했던게 아니라 [거짓말]을 사랑하고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성우역의 배종옥씨를 캐스팅했을 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시놉시스를 읽고, 이 드라마의 말미에 성우처럼 사랑이 있다라고 믿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후일 들은 얘기지만 그녀는 성우를 제 마음에 두기 위해 울고 또 울었다 했다.
은수역을 한 유호정씨에 은수를 설명하던 때를 또 기억한다.
그 큰 눈을 껌벅이며, 정말 은수처럼 천진하게 좋아하던 그녀는 이 작품이 당분간은 마지막이 될거라 했다.
준희역을 한 이성재씨는 힘들다고만 했다.
응석이 아니었다. 준희의 삶을 그의 사랑방식을 이해하고 있었다.
버거웠을 것이다. 머리가 아닌 마음을 내는 일은 늘 그렇듯 고단한 것 아니겠는가.
그리고 다른 역할의 연기자들, 그들도 한결같이 [거짓말]을 사랑했다.
그래도 이제 정말 [거짓말]을 잊고 싶다.
첫 사람을 버리고 두 번째 사람에게 갔을 때 첫 사람을 품고 가면 안되듯이 다음 드라마는 [거짓말]을 잊어야만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어려선 세상에 사랑이 한번만 오는 줄 알앗다. 그게 아니었다.
극중 영희의 대사처럼 사랑은 또 왔다. 처음같진 않았지만 나중 것은 나중 것대로 깊이가 있었다. 나는 이제 [거짓말]을 잊고, 다시 또 다른 드라마를 사랑하려 한다.
사람들은 묻는다. 다음엔 어떤 드라마 쓸래요?
말한다. 나도 몰라요, 하지만, 믿는다.
첫사랑에 목숨건 사람은 두 번째도 목숨을 건다고,
나 자신 다음 드라마도 목숨 걸어 사랑하리라는 것을.
그런데 내가 정말 [거짓말]을 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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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998년 4월호)
구둘레 기자

[인터뷰] '거짓말'의 작가 노희경

"사랑은 있다"
목소리가 털털한 노희경(33)씨는 술은 전혀 못한다 한다.
좋은 드라마가 눈길을 끌었지만 시청자들에게 이름이 아직은 낯설다.
노희경씨는 MBC 수목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를 썼고 ' 아직은 사랑할 시간'이 KBS 드라마스페셜 1회를 장식했다.
'아직은 사랑…'으로 표민수 PD와 만났고 의기투합하여 '거짓말'을 준비했다.

- 시청률이 낮다. 신경쓰이겠다.
= 첫 방송 나가고 나서 통신을 둘러보고는 '거짓말'이 시청률 1위인 줄 알았다. 다 좋았다고 하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하지만 출연자도 그렇고 스탭들도 그렇고 서로 힘빠질까봐 신경써 주고 위로하면서 지내고 있다. 쓴 드라마가 시청률이 이렇게 떨어진 건 처음인데 시청률 떨어지고 이렇게 분위기 좋은 것, 희한한 경험이다.

- 벌써 12회분의 대본이 나오고 기획기간이 길었다고 들었다.
= 구상도 오래하고 쓰기도 오래 썼다. 다른 작가들은 비웃더라. 작년 10월부터 시놉시스를 썼다. 시놉을 디테일하게 쓰는 편이다. 12월부터 대본작업에 들어갔다. 지금 거의 95% 완성되었다.

- 드라마를 보면 사랑에 대한 정의가 많이 나온다. 사랑하기 때문에 마음이 아프고 눈에 보인다고 하고. 드라마에서 보이는 사랑은.
= 이 사랑에 대해 불륜이라는 말을 한다. 하지만, 사실은 불륜이지만 불륜이 아니다. 불륜이 성적인 쾌락이나 고민없는 사랑이라면 모르겠지만, 이들은 키스도 안 한다. 팔짱끼는 것도 그들은 아주 힘겹게 한다. 사랑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에 더욱더 몸을 사리는 것이다. 준희도 청계천에 간 걸 고백하지만 세상 50% 남자는 거기에 가봤을 거다. 그런 50%가 하는 일은 다 괜찮고 왜 사랑은 안 되나. 그리고 불륜이라고 말하는데 ‘마음의 불륜’은 어떡하란 말인가.

- '달팽이'도 그렇고 '사랑'도 그렇고, 잔잔한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연하의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 이 드라마의 중심은 두명의 여자다. 성재는 성우와 사랑에 빠지지만 절대로 드라마 진행에서 은수를 놓치지 않는다. 성우는 사랑은 없다고 생각하는 인물이다. 상처가 많다. 이런 여자에게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우쳐 줄 수 있는 사람은 순수한 인물이어야 하고 아무쪼록 나이가 어린 남자가 더욱 더 순수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세미와 장어의 이야기가 맥락에서 좀 떨어진 듯한 느낌도 든다. 하지만 세미가 동진이 사준 밥을 먹고 먹물이 싫다면서 구토하는 장면, 물컵에 손을 담궈 손가락을 씻고는 입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장면은 정말 사실적으로 보이기도 했다. 취재는 어떻게 했는가.
= 이 드라마의 제목이 거짓말이다. 사실은 거짓말 같은 진실이다. 진실이라고 제목을 붙이고 싶기도 하지만 사실 진실은 다 뻥 같지 않는가. 거짓말이 더 진실에 가까울 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미와 동진의 사랑은 정말 거짓말 같은 사랑이다. '귀여운 여인' 보고는 우리나라 사람들 말도 안 된다고 하진 않았다. 물론 우리나라에서 기자와 거리 부랑아와의 사랑이 벌어지면 다 거짓말이다 그럴 거다. 그러나 사랑은 일어날 수 있다. 이후에 사랑할 수 있는 디테일한 부속들이 등장하면 시청자들이 이해할 수 있을 거다. 말도 안 되는 설정이다 생각하지 말고 일단 봐준다면.

- 소위 톱탤런트들이 없는데 캐스팅에 불만은 없었나.
= 지금 만족한다. 톱탤런트들이 있었다면 시청률은 높아졌을 것이다. 하지만 배종옥씨에게도 그런다. 언니, 언니가 아니었다면 아무도 이 역을 하지 못했을 거다. 정말 다른 배우들도 다 그렇다. 배종옥씨는 정말 머리 찧어가면서 열심히 한다. 처음 준희랑 만나서 술마시면서 우는 장면이 나온 극본을 보고 배종옥씨가 ‘나 못운다’고 그랬다. 그래서 안약 넣으면 되겠지 생각했는데 그것 울려고 배종옥씨 정말 술마시고 울었다. 그 뒤로 연출도 그런다. 배종옥씨, 술만 들어가면 쏟는다고. 연기자들이 ‘정말 이게 사랑하는 거구나’라는 생각을 하며 연기하고 있다. 유호정씨는 아기 낳기 위해서, 배종옥씨는 유학 때문에 이것이 마지막 작품이 될 것 같다. 이성재씨는 주연급 배역은 많이 맡았지만 일종의 스타덤을 경험하지 못했다. 요즘은 이성재씨 보면 그런다. 이거 못뜨면 지나가는 역할도 해라.

- 95%가 완성되었다는데 이후로 어떻게 되는가.
= 모두 해피엔딩이다. 준희는 떠났지만 성우는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만으로 행복하고, 준희는 다른 사랑도 있다는 것을 알았으니 행복하고, 은수는 준희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으므로 행복하다. 세미와 동진은 부모님을 속이고, 결혼한다.

- 사랑에 대한 믿음이 강하다.
= 요즘 IMF로 나가떨어지는데 사랑이 없어서 다 죽는 것 같다. 나는 성선설을 믿는다. 사랑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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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1998년 6월호)
구둘레 기자

컬트 드라마, <거짓말>과 작가 노희경

"오늘은 거짓말을 잊으려 딴짓을 해보았다"
6월2일 <거짓말>이 끝난 날, PC통신 팬모임방 채팅실에 사람들이 한둘 모이기 시작했다. 이런 채팅은 6월1일에도 있었다. 소모임이 결성되었으므로 정기적인 채팅도 이루어질 것이다. 거짓말을 사랑하는 사람이면 뭔가 통하는 사람일 거라는 게 소모임을 만든 이들의 취지다. 이들은 올라오는 극본을 다 읽고, 본방송 보고, 재방송 보면서도 운다고 고백한다. 그들이 신같이 모시는 이들은 거짓말로 통칭되는 모든 것이다. 작가, PD, 연기자, 음악….
이들이 <거짓말>을 얼마나 사랑하는가는 PC통신의 ‘거짓말’방 감상문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원고지 20매 이상의 감상문이 허다하다. 각 글마다 조회수는 무던히 1백회를 넘고 3백회에 가까운 글도 많다.

사랑하고 싶다(SONGONE),
20시간짜리 영화(L73D88),
제가 사랑을 한 것 같아요(DAHYUN01),
수준이 낮아서 다른 것 못보겠다(SIEMENS7)....라는 제목들,
“오늘은 거짓말을 잊어보려고 딴짓을 해보았다.
이러다간 드라마가 끝난 뒤에 공허감에 시달릴 것 같아서…"

이런 대사가 있었다.
‘길을 걸을 때도, 운전을 할 때도, 잠을 잘 때도, 선배가 자꾸 보여요’
그렇다. 그것뿐인가… 뒤에 바퀴를 하나 달고 다니는 산타모를 볼 때마다... 꼬마 선인장을 볼 때마다… 스카프를 볼 때마다… 호수공원을 지날 때마다… 나는 또 거짓말 생각을 한다.”(SPADER)라는 열렬한 고백, “준희는… 많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남이 보기에 그것이 관념적이고, 때문에 위선적으로 보일지라도요. 준희가 성우를 사랑하기 시작했을 때를 기억해 보면 알 수 있지요. 성우가 왜 그토록 모가 나 있는지, 자꾸자꾸 생각하다가, 사랑하고 만 겁니다”(YEOWOO1)라는 캐릭터 분석, “은수에게 돌아오게 해주세요” “성우를 버리지 마라”라는 격렬한 토론까지 모두 그들이 얼마나 <거짓말>에 열광을 받치고 있는지 느껴진다. 이런 드라마 <거짓말>은 시청률이 20% 이상 넘은 적이 없다. 20%가 뭔가. 12∼13%를 왔다갔다 했고 마지막회가 고작 18% 정도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컬트라는 딱지가 붙기도 한다.
은수(유호정)와 준희(이성재)는 결혼한 지 3년된 부부. 준희는 회사상사인 성우(배종옥)의 상처를 보고 마음이 흔들린다. 이 삼각관계가 드라마를 끌고가는 축이다. 은수의 옛 애인인 동진(김상중)은 거리의 부랑아인 세미(추상미)와 사랑에 빠진다. 성우의 어머니 영희(윤여정)는 첫사랑 주현철(주현)을 만나고 결혼하게 된다. 빼어난 대사와 엇갈림의 화면기교, 각 커플마다 정해진 음악, 물이 오른 배우들의 탄탄한 연기가 혼연일체로 드라마를 끌고간다. 특히 이 드라마의 ‘하다’체 대사는 시청자들을 자신이 진짜 사랑에 빠진 듯 몰아가는 힘을 발휘했다.
<거짓말> 작가 노희경(33)씨는 MBC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과 수목드라마 <내가 사는 이유>를, KBS에서 단막극 <아직은 사랑할 시간>을 쓴 데뷔 2년차 작가다. 드라마가 막 끝난 때에 만난 노희경씨에게 아직 이성재는 준희, 배종옥은 성우, 유호정은 은수다. 허탈감을 이기지 못해 집을 뛰쳐나갔다고도 한다. 노희경씨에게 <거짓말> 마니아들이 궁금해하는 것을 질문해 보았다. 질문은 6월2일 이루어진 채팅에서 채집한 것들이다.

- 드라마를 어떻게 쓰게 되었는가.
=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가 어떻게 드라마 교육원을 찾아갔는지. 가다보니 그 집 앞이듯이. 쓰면서는 재밌었다. 무심하게 들어온 덴데. MBC베스트극장 공모에 당선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95년에 당선되었는데 96년 4월에 창사 기념일에 방영되었다. 반응이 좋아서 <내가 사는 이유>를 쓸 수 있었다.

- 글 쓰는 건 어떤가.
= 그림도 못 그리고, 피아노도 못 치고. 글짓기를 하고는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잘하는 게 그거 딱 하나였다. 그래서 초등학교 5학년 때 글을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한번도 변하지 않았다. 소설은 썼지만 즐겁지 않았다. 고통스러웠다. 드라마 쓰면서 편했다.

- 특히 어떤 점이 드라마의 매력인가.
= 일회성이니까 허무하다, 집을 뛰쳐나올 만큼. 어제 마지막 회를 보고 집을 뛰쳐나왔다. 10개월을 미쳐서 지냈는데, 한 순간에 끝나버리고. 마치 사귀었던 애인을 떠나보낸 것 같다. 그것도 싫어서 헤어지는 것도 아니고. 그런데 사는 게 그런 것 아닌가. 버려지는 것들, 소홀히 다루는 것들. 길거리 걸어가는 것, 밥 먹는 것들 다 소설에서는 여백으로 밖에 처리 안 되는 것이다. 그게 사는 거다. 그리고 겸손해서 좋다. 드라마는 아무 것도 없는 사람하고 가는 것 같다.

- 결혼 했나.
= 안했다. 못했겠지. 나는 인생을 개척해야 된다는 생각은 안 든다. 그냥 운명이려니 하는 생각. 이렇게 하다가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가는 거고. 백년 살면 죽는 건데. 경험? 글 쓰는 데는 경험과 상상력의 절묘한 결합이 있어야 한다. 경험은 수학같다. 하나를 알면 열을 안다. 하지만 또 틀린 점은 수학은 그 하나를 까먹을 수 있다는 거다. 경험은 그렇지 못하다. 지금까지 사랑 안 했다면 변태겠지. 이별도 했고. 상처받은 사랑도 이렇게 나에게 교훈을 주는구나. 유부남을 좋아한 것도 아니고 그냥 보통 사랑이었지만. 내가 인생에 대해서 사랑에 대해서 정의를 많이 내렸지만 내가 다 아는 게 아니다. 쓰고서도 잘 모를 때가 많다. 내가 쓰고 나서도. 알고 쓰는 게 아니라 기대와 희망으로 쓴다. 정의를 내리는 게 아니라 사랑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 소재는 어디서 얻나.
= 가장 만나보고 싶은 사람, 안쓰러운 사람과 주제를 정해 놓고 만날 생각한다. 어디서 책을 읽고, 글을 보고 하다가 얻는 건 아니다. 어떤 사람의 일상이 있는데 쫓아간다. 운명처럼 오는 것들. 쟤는 왜 저럴까. 쟤는 이래서 저럴 거야. 남들이 보면 미친 사람같아.

- 어떤 점이 아쉬운가.
= 등장인물에게 미안하다. 여러가지 고통을 더 생생하게 실어주지 못했다. 사표 쓰는 대신 휴가원을 낸 성우 같은 경우, 삶의 무게 때문에, 기분좋게 그만둘 수 없었을 것이다. 돈이 아니라 생활의 무게가 느껴지니까. 상처에 더 깊이 들어가지 못했다. 은수가 고아라는 것, 가지고 있는 일에 대한 의미 등이 사랑에 포커스를 맞추면서 없어졌다. 준희의 작품에 대한 열정, 부모에 대한 사랑 등이 아쉽게도 빠졌고 영희, 현철 부부 같은 경우도 정리해고, 폐경 같은 것이 수박 겉핥기 식으로 지나가 버렸다. 이렇게 다 아는 데 쓸 때는 안 보인다. 경마할 때 차양을 씌우는 것 같다. 작품을 이렇게 다하고 나면 보이는데.

- 마지막의 자막 뜨는 장면이 특이했다.
“그들 중 누구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
그리고 그 기억 때문에 행복했다,
거짓말처럼”
이 마지막에 자막으로 깔렸다. 누군가는 허우샤오시엔이 나타났다고 했단다.
= 표민수 PD가 그랬다. 어떤 때는 아무 말이 필요없을 때가 있다고. 15초 이상 아무 소리도 없이 있었던 게 처음일 거란다. 사랑이 주제라면 상처여도 교훈을 준다. 사랑이 주는 교훈을 상처 때문인지 안 좋아한다. 일부 사람들. 성우가 상처가 있겠지, 안됐다 하는데 사랑한번 못해본 사람이 하는 소리다. 그게 무슨 상처겠냐. 사람들 모두 행복했으면 한다. 모두 꿈이겠지만. 모두 거짓말이겠지만. 내가 사는 이유에서도 그랬다. 모두가 행복했으면 했다. 작의적으로 다 못되는 확률이 현실에서는 더 많지만, 드라마에서나마 행복해서 다행이다.

- 결말에 대해서 의견이 분분하다. 공중파의 한계라는 말도 한다. 특히 한국방송공사와 그에 속한 PD가 가지는 선 같은 것.
= 이미 시놉시스에서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초고를 완성한 상태에서 시작했다. 외부 영향은 없었다. 공중파의 한계, 그런 건 아니다. 상처도 용기가 된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 마지막 엔딩신에 다 같이 모여 있는 것은 좀 작의적이지 않았나. 원래 의도인가.
= 시놉에 그렇게 나와 있었다. 하나는 서울, 하나는 상하이, 하나는 뉴욕에 있다 하더라도 그들은 한공간에 있는 것이다. ‘무사하다’는 표현 있지 않나. 성우도 무사하구나, 준희도 무사하구나, 은수도 무사하구나 하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애착이 가는 대사.
= “사랑은 계절 같은 거다”라고 영희가 하는 대사. 믿고 싶다. 사랑이 또 온다는 걸. 그리고 마지막 자막 글도 애착이 간다. 또 다시 온 사랑은 처음에 온 사랑보다도 더 좋을 거다. 상처받을수록 성숙해지는 것이고.

- 선인장에 대한 은유가 탁월했다.
= 미국을 가보지 않아서 드라마에서의 선인장을 본 적은 없다. 제주도에 가서 선인장을 봤다. 사막에 선인장이 없으면 안 되지 않나. 자기 몸에 물이 있어 나눠주는 존재의 묵직함. 사막에는 선인장이 ‘있다’. 때때로 생물이 사람보다 더 이쁘다. 자존심 같은 가시가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했다. 그래서 성우가 만들어진 것이다.

- 음악은 어떻게 선정한 것인가.
= 표민수 PD가 선곡했다. 마지막에 가사를 넣은 노래는 원래 있었는데, 비트가 강해서 쓰지 않다가 나중에 썼다.

-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 배종옥씨는 너무 잘 울어. 연기를 잘해서가 아냐, 다 자기가 연기하고 있다고 말 안 한다. 은수나 성우, 준희뿐 아니라 다 거짓말의 배역이 되어 살았다. 그래서 다 투덜거렸다. 너무 힘들어 미치겠다고. 유호정씨는 은수가 할 것 같은 매니큐어, 옷을 입고 다녔고. 성우처럼이 아니라 성우가 됐다. 그들은 어떻게 연기해요라고 묻지 않는다. 무슨 맘으로 이렇게 걸어요? 하고 묻는다. 어떤 작가도 부럽지 않다. 마음으로 하는 연기자, 스탭을 만나서.

- 성우는 강한 사람인데 너무 강하지 않은 사랑을 주지 않았나.
= 엄마가 자식 앞에서 강해질 수 없듯이 거기서 강해지면 사람냄새가 안난다. 전형적인 인물을 창조하는 법이 있다. 하지만 강한 사람의 약한 모습, 약한 사람의 강한 모습이 좋다. 나를 보고 사람들이 당돌하게 생겼다라고 하는데, 겉모습을 보고 나를 알았다고 할 수 있는가. 사람들이 못보는 인물의 숨겨진 모습을 창조해나가는 것이다.

- 컬트라 지칭되는 것에 대한 생각.
= 호러만 컬트인 줄 알았다. 대중매체에도 컬트가 있단다. 내가 만들었으니 좋다. 하지만 반성이 된다. 많은 사람과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많이 진지했다. 많은 사람이 갑갑해 하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쯤은 이런 드라마가 있어도 되지하고 시작했던 것인데. 쓰다보면 미쳐서, 빠져서. 시청자들이 버거워했을 것이다. 그래서 컬트가 된 것이고. 힘들다. 너무 진지해서 나도 힘들다. 준희는 이건 멜로가 아니라 완전 철학이다라고 했다. 이제 경륜이 쌓이면 조절할 수도 있겠지. 내가 한시간을 책임지고 영향을 주는 건데 달래주고 하면서. 강변을 하며 끌고 온 것 같아 아쉽다. 내 아는 대작가님이 극은 마스터베이션이다, 엄마, 삼촌 같은 사람을 놓치고 갔다, 버리고 갔다,고 했다. 그말을 가슴으로 받아들였다. 진지함과 여유를 가지고 싶다. 다 데리고 가고 싶다. 드라마 속으로.

- 다음 작품은.
= 일단 MBC에 간다. 어떤 걸 쓸지 정하지는 않았다. 일단은 많이 자야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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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센스 (1998년 6월호)
강은영 기자

노희경을 분석한다
"거짓말" 노희경작가


요즘 드라마 답지 않은 사랑에 대한 잔잔한 해석과 감성적인 대사로 주부들의 눈길을 잡고 있는 KBS 2TV 월화 미니시리즈 '거짓말'.
도대체 작가의 나이가 얼마나 되었길래 그렇게 어른스럽게 사랑에 대한 해석을 내리는지 궁금한데 놀랍게도 작가는 데뷔한 지 2년밖에 안되는 노희경씨, 서른 두살난 미혼 작가다.
지난 3월부터 방영된 이 드라마에는 시쳇말로 흥행(?)을 보증하는 톱스타가 나오는 것도 아니고, 사실 시청률이 높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열성팬들의 모임이 생기고 PC 통신에는 드라마에 대한 칭찬의 글들이 연일 올라온다.
"처음에 PC 통신의 반응을 보고 시청률 1위인줄 알았어요. (웃음)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고 열연하는 연기자들이 안쓰럽고 고마워요."
털털한 목소리에 외모마저 선머슴 같은 노희경씨.
그녀의 드라마를 단연 돋보이게 하는 것은 가슴을 파고드는 감성적인 대사다.

"이곳에 와서 한 고백은...(밖에) 나가면 그 죄를 묻지 않는다며?
....널, 사랑한다. 아멘."

5월초 주인공 성우(배종옥 분)가 성당에서 연하의 유부남인 (이성재 분)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장면은 한동안 화제가 되었을 정도로 인상깊었다.
김수현류의 따발총같은 감각적 대사와 또다른 곰삭은 맛이다.
'거짓말'은 '거짓말 같은 사랑'의 줄임 말이다.
유부남의 불륜, 엘리트와 밑바닥 인생의 사랑, 중년의 사랑등이 씨줄 날줄로 짜여있다. 자칫하면 빠져버릴 상투성의 함정이 곳곳에 포진해 있지만 그녀는 노련한 솜씨로 경계와 편견의 벽을 깨뜨리는 사랑의 힘을 억지스럽게 않게 풀어서 보여주고 있다.
단막극이 아닌 '대작'을 쓰는 것은 96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MBC) '내가 사는 이유' (MBC)에 이어 세번째이다.
"인생의 탄탄대로를 걸었다면 아마 드라마를 못 썼을거예요.
드라마를 쓰고 나서부터 내가 가난하고 문제아였던 것.
심지어는 내게 상처를 준 모든 이들에게까지 감사하는 마음이 드네요."
2남 4녀중의 막내. 가난한 집안의 막내로 어릴 때는 투정이 심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는 장난 꾸러기에다 문제아가 될 시초를 보여줬으니 이른바 '담배사건'.
어른들이 뻐끔뻐끔 피워대는 모습이 부러워 초등학교 5학년 때 담배를 피웠다. 어린 것이 뭘 담배 맛을 알겠냐 싶지만 "너무 맛있었다."라고 말하는 그녀다.
그러나 담배 피우는 모습을 작은 오빠에게 들켜 혼나는게 무서워 집을 나간 것이 첫번째 가출이었다.
중고등학교 때는 아예 '문제아'로 낙인 찍혔다.
학교에서 친구들과 놀다가 불을 낼 뻔하지를 않나 한겨울에 '라면 사갖고 들어오겠다'고 나가 일주일씩 집에 안들어 오질 않나....
그녀의 어머니는 무던히도 학교에 불려 다녀야 했다.
고2때는 친구들과 산에 올라가서 "안먹어"라고 손사래를 치는 그녀에게 친구들이 억지로 술을 권해 마셨다가 기절, 병원 신세를 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가 급기야는 유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다.
"그렇게 문제아였지만 스스로는 나를 믿었어요. 또 나를 믿었던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 친구들이 함께 활동하던 문예반 친구들이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데 재능을 보였던 그녀는 막연히 자기가 나갈 길은 글쓰기가 아닐까 생각하곤 했다. 대학 입시에 실패한 뒤 재수할 무렵부터 그녀는 공장을 다녔다. 생산직 근로자였다. 먹고 살기 힘들어서 나간 일이었지만 한편으론 재미도 있었다고 한다.
두번째 대입시에 실패한 후 그녀는 스스로 서울예전 문예 창작학과를 택했다. 가족들은 후기대를 치라고 권유했지만 소설가 최인훈씨가 재직 중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서울예전을 택했다.
"당시 저는 시인이 되고 싶었어요...."
그러나 시 창작 시간에 담당 교수의 "너는 시를 못쓴다. 시를 쓸 수 있는 구조 자체가 안된다. 차라리 소설을 써라"는 말에 심한 좌절을 느껴야 했다. 급기야 어린 마음에 반항심이 일어 "그래, 안쓰면 될 것 아니야!" 혼잣말을 하면서 시인이 되는 걸 포기했다. 그렇다고 소설 공부를 하는 것도 아니면서 그녀는 스스로 표현대로 '막 살았다'. 그야말로 어떻게 보면 청춘을 허비했다는 표현이 어울릴 정도로.
".... 세상살 자신이 없었어요. 낭만도 아니면서 퇴폐적 객기랄까 그런 구석이 많았지요."
학교에 가서도 공부도 뒷전인 채 거의 술을 마시고 지냈다. 집에도 며칠씩 안들어 갔다. 방학 때는 아예 나가 살았다.
그녀는 스커트를 만드는 봉제공장에서 숙식을 하며 미싱사 보조, 소위 '시다'를 하며 살았다. 80년대 많은 대학생들이 그랬듯 노동운동을 위한 '현장진출'이 아니라 그냥 친구따라 아르바이트 하러 나선 것이었다.
이런 딸 때문에 그녀의 어머니는 무던히도 속을 많이 썩어야 했다.
그녀가 기억하는 슬픈 초상화 하나,
학기중 일주일째 집에 안 들어갔더니 어머니가 학교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부를 사러 나왔다가 네 생각이 나서 그대로 왔다"며 어머니는 그녀의 얼굴을 본 뒤 돌아갔다.
그로부터 몇 년 후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신 후 그녀는 한동안 뒤늦은 어머니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괴로워했다.
그러나 어머니가 돌아가실 때 막내가 앞으로 글을 쓸 아이라고 믿고 돌아가신 것은 그나마 위안으로 남는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는 마포에서 8개월 동안 포장마차 장사를 해보기도 했다. 그녀는 그 시절이 너무 행복했었노라고 말한다.
" 웬 포장마차냐구요? 학교 다닐 때 술 마시러 포장마차에 자주 갔었는데 포장마차 음식이 맛있었어요. 널판지 의자에 앉는 기분도 좋았구요. 아는 사람이 같이 해보자 그러길래 선뜻 동의 했죠."
그녀는 주방일과 손님 시중을 맡았다. 저녁 6시부터 새벽 4시까지가 영업시간이었다.
포장을 접고 나면 아침 6시. 시장을 보고 재료를 다듬으면 정오. 그때부터 눈을 붙여도 오후 5시에는 일어나야 했다.
" 잠이 늘 부족했어요. 그래도 마음은 편하더라구요....
그렇게 막 살다가 죽고 싶었어요. 글 쓰는 게 무서웠고 사회에 나가서 일한다는 게 무서웠어요."
당시 노희경씨는 사회 부적응자였다.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잘 못했다. 포자마차 손님들과도 장사꾼으로서가 아니라 친구처럼 대했기에 약간의 말이라도 나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 부터 포장마차 생활이 싫어져 들어간 곳이 아동물, 성인출판사. 비로소 제대로 사회인으로서 첫 발을 내디딘 셈이었다. 워낙이 뭐든지 한번 빠지면 푹 빠지는 성격이라 출판사에서도 정신없이 일했다.
5년동안 일하다가 사표를 던진 것이 지난 94년.
무조건 여행을 했다. 돌아와서 소설을 쓰려다가 한 선배의 권유로 드라마 교육 연수원에서 공부를 하던 중 95년 MBC공모전에 출품한 '새리&수지'가 당선되어 드라마 작가가 되었다. 이런 저런 경험 속에서 관찰한 사람들의 표정이 그녀가 쓰는 드라마의 소중한 밑천이다.
"주위에서 사람들이 드라마를 써보라고 했어요. 공부를 하다보니 소설보다 재밌더라구요. 소설에서는 설명되어야 할 감정을 드라마는 표정하나로 보여줄 수 있어요. 힘들지만 매력적이예요."
늦게 방송과 인연은 맺었지만 작가로서 그녀는 빠른 성장을 보이고 있다. 언젠가 작가가 되면 엄마의 이야기와 어린 시절 그녀의 추억이 묻힌 마포의 이야기를 하리라 했는데 실제 그녀의 경험담일 수 있는 죽음을 앞둔 모녀간의 사랑이야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로 주목받는 신인작가로 떠올랐고 그 드라마는 백상예술대상 TV부문 작품상과 대상이라는 영예를 주었다. 그리고 처음 썼던 연속극 '내가 사는 이유'를 통해 가난이 아름다웠던 노희경의 '20년 세월'을 드라마 속에 녹여냈다.
".... 사람은 저마다 삶의 무게가 있어요. 어떻게 살든 사람에게는 값어치가 있다는 말이예요. 문제아면 문제아대로 삶에서 얻어지는 것이 있습니다. 저는 지금도 포장마차 주인으로 인생을 마쳤다고 해도 삶의 무게가 현재와 다르지 않다고 봐요."
한때는 그렇게 삶이 버겁고 두려웠다는 그녀.
이제는 삶 두렵지 않다. 미싱사 보조, 포장마차 주인, 출판사 직원을 거쳐 드라마작가가 되는 직업적 변화를 겪으면서 삶의 변화에도 두려움을 갖지 않게 되었다. 추락하면 추락하는 대로 또 성공하면 성공하는 대로 의미가 있어란 것.
이것이 그녀가 삶에서 배운 결론이다. 그래서 드라마 작가를 하고 있다가 언제 다시 엉뚱한 일을 저지르더라도 거기에서 삶의 오묘한 맛을 배울거라는 그녀다.
이제 6월달로 '거짓말'이 막을 내리면 진짜로 드라마를 안 쓰고 푹 쉴 계획이다. 3년 동안 자신을 너무 갉아먹고 우려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음 작품은 아직 구상 중.
막연하게나마 그리고 있는 것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사랑의 기쁨이 들어있고 인생의 쓴맛, 단맛, 좌절, 희열이 한꺼번에 다 어우러져 있는 드라마를 쓰고 싶다. 한마디로 우리네 인생을 자연스럽게, 그러나 성숙하게 그린 드라마를 쓰고 싶다.
아직 결혼은 자신이 없어 생각 못하고 있지만 안할 생각도 없다는 노희경작가. 그녀가 걸어온 삶의 고단함과 다난함이 멋지게 어우러진 작품과 만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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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그 VOGUE (1998년 7월호)
김부영 기자

배종옥 인터뷰
삶을 사랑한다, 아멘


'나이에 덜미 잡힌다는 건 재미없다'
라는 서른다섯 살의 배종옥.
헤픈 감성 아닌
깊이있는 심장으로 연기하는,
좋은 배우가 되는 꿈을 품은.
이제 서른 즈음의 마음아픔을
단정히 추스린 그녀.
일만큼 설레게,
또 가슴벅차게 만드는 건 없다는 그녀.
단정한 울림이 있는 고해.
"널 사랑한다, 아멘."
드라마 <거짓말>에서 했던 대사였다.
그 몇마디를 난, 백번도 넘게 되풀이해서 외웠다.

- 누가 일 중독증 아니랄까 봐?
= 아니, 난 타고난 배우도 아니고, 남들처럼 '끼'라는 것도 없다. 그러니, 탈진할 때까지 연습에 골몰할 수밖에. 그리고, 그 '아멘'이라고 내뱉었을 때의 느낌. 그때, 내 발음과 함께, 심장 어딘가가, 아니면 명치께였나, 아무튼 같이 진동하던 느낌, 참 좋았다.

- 요즘, KBS, SBS 두 드라마를 해내느라, 감동할 틈도 없이 바쁘게 지냈는데,
= 그처럼 <거짓말>의 대사들은 자주 날 설레게 했다. 일할 때는 바짝 긴장해서, 조금이라도 쉴 맘을 못 먹는게 내 천성이다. 그래서, 우리 딸아이, 채은이하고도 같이 놀아주지 못하고. 이렇게, 딸아이 얘기를 하면, 많은 이들이 내 서른 살 즈음의 일들을 생각해 낼 것이다. 그러니까, 서른에 결혼하고, 다음 해에 이혼하고, 채은이를 낳고...흠, 그때 내가 꽤나 많은 일을 겪었었군. 그러고보니, 나는 서른 다섯이다.

- 나이에 대한 강박?
= 스물 아홉 때는 있었다. 서른이 되면, 그러면 어쩌나, 뭐 그런 시덥잖은 생각도 했었지. 하지만, 나이 따위에 연연한다는거, 재미없다. 젊은 애들은 자꾸 나타나는데, 난 뭐지? 나보다 예쁜 탤런트들 많은데, 난 뭐지? 그런 생각은 우습다. 그래, 난 나이 먹었어, 아줌마 역도 할테고. 하지만 내가 하는 아줌마 역은 다를거야. 그런 생각이다. 나이 먹는다고 쩔쩔맨다면, 시시하잖는가. 내가 마음쓰는 건, 무례하게 눈가를 범한 주름살이 아니라, 좋은 배우가 되는 것.

- 나에게 일이란?
= 나를 설레게 하고, 가슴 벅차게 하고, 또 스스로를 독하게 추스리도록 만드는, 그런... 우리 채은이에게도 아주 어려서부터 얘기해 두었다. 엄마가 바쁠 때는 같이 놀아줄 수 없지만, 일 마치면, 여행도 가고, 나를 온전히 너에게만 내 주겠다고.

- 특히나, <거짓말>은 아주 많이 몰입했던 드라마였다.
= 도회적이고 강하고, 일 잘하는, 그렇게 규정되어온 배종옥식의 캐릭터에 갇히는게 싫었다. 멜로, 하고 싶었다. 하지만 여태까지 여주인공들이 보여 줬던, 그저 여리고 눈물 많을 뿐이던 모습은 맘에 안 들었다. 당당한 여주인공,하지만 어쩌지 못할 사랑앞에서의 흔들림, 그것을 연기하고 싶었다.

-< 거짓말>같은 사랑이 실제로 온다면? 연하의 유부남과의 사랑?
= 나라면, 그 사랑을 내려놓을 것이다. 다른 사람 맘 아프게 하는 사랑, 그건 못할 것 같다. 드라마에서의 대사처럼, 다음 삶에 만나서, 그때는 서로의 옆에 아무도 있지 않기를 바라겠지.

- 내가 생각하는 사랑의 이상?
= 글쎄...나무같은? 넉넉한 그늘을 만들어 주고, 힘들 때면, 선선히 받아들여 쉬게하고....열두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하지만, 그 일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다고 생각해왔다.그런데, 내 사랑의 풍경에는 아버지 같은 남자가 나타나야 한다고 바랐던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도 든다. 내가 이기적인가? 하긴, 모든 남자는, 내가 그들에게 바라듯, 어머니 같은 사랑을 찾으려 들텐데.

- 드라마 <서울탱고>에서는 동생 뒷바라지하느라 결혼도 못한 서른 다섯 살 여주인공 역이다.
= 그녀가 드라마에서 보여주는 가족을 위한 희생...그 희생으로 자신의 삶이 어찌 되든 받아들이겠다면 아름다울 것이다. 하지만, 너희 때문에 이런 힘든 삶을 살아야겠다, 라며 무너진다면, 구차하지 않을까. 난 현모양처도, 모성도 강한 엄마도 아니다. 난, 내 일에 기뻐하며 살아가고, 또 그런 모습을 아이에게 보여주는 것이 더 멋지다고 생각한다. 드라마말고, 날 즐겁게 하는 일은 강의, 또 그렇게 만나는 젊은 후배들. 14년 동안 연기를 해오면서, 도무지 어째야 할지 버거웠던 적이 많았었다. 그걸 어떻게 버텨냈는지, 후배에게 알려주고 싶다.

- 다시 젊은 시절로 돌아간다면?
= 싫다. 젊음이라..., 내게 재능이란게 있을까, 내가 꿈꾸는 게 대체 가능한건가, 그런 강박관념에 벅찼었던 그 때. 나는 그 혼란에서 놓여 난 지금이 좋다. 겨울쯤엔, 유학을 가려한다. 하지만, 뭘 이루어서 와야지, 라는 조급증은 없다. 삶의 어느 한 시점, 낯선 곳으로 잠깐의 망명. 멋지지 않은가. 물론, 연기를 배울 수도 있겠고, 영어를 배울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새로움과의 조우, 그 두근거림만으로도 떠남에 대한 이유가 되잖을까. 또, 난 앞으로도 일에 바쁠 엄마일테니까, 채은이와 넓고 새로운 곳에서 함께 지내고 싶고. 그런데, 우리 채은이는 뭘 잘 안먹어서, 할머니를 속 태우게 만든다. 나라면 굶겨서라도 버릇을 고쳤을텐데, 정 많은 우리 어머니는 그렇게 못하시겠단다.

- 아버지 얘길 채은이가 묻지 않나?
= 이런 물음을 내미는 앞에선, 대답하기에 많이 조심스럽다. 채은이가 자랐을 때, 자기에 대해 엄마 생각대로만 얘기했다고 언짢아할 수도 있으니. 아직 채은이는 어리지만, 난 그 애가 친구같다. 우리집엔 올해 일흔여섯이 되신 우리 어머니, 채은이, 나, 그렇게 산다. 어머닌, 마흔 둘에 날 낳으셨다. 어깨 맞대고선 드라마 보며 같이 울고, 같이 깔깔대고, 같이 화내고, 뭐 그런 살가움은 없다. 하지만, 어머닌 어떻게든 날 챙겨 주려 하신다. 좀 젊었으면, 매니저 했을텐데, 그런 말씀도 하시고.

- 꿈?
= 좋은 배우 되는 것. 그리고 좋은 영화, 꼭 하고 싶다. 헤픈 감성이 아니라 깊이있는 심장으로, 치기어린 연기가 아니라 공 들인 몰입으로. 아, 그리고 많은 이들이 조심스럽게 사랑얘길 묻고 싶을 것이다.

- 어느 날, 내게 다가온다면,
= 사랑, 할 것이다. 결혼? 삶의 아름다운 정경들을 함께 지켜볼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만...

- 사랑의 고백?
= 솔직히, 연애 해본지가 오래돼서, 그 감정이 어땠었는지...그런데, 사랑이란 것이 꼭 털어놔야 알 수 있는건가?

- 그래도 고백을 해야 한다면?
= 그냥 솔직할 것 같은데. <거짓말> 때 대사처럼, 그러니까 "우리 연애할래?" 혹은 "너랑 살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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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스트 계간 'if' (1998년 가을호)
권혁란 기자

거짓말, 거짓말, '진짜' 거짓말
그리고 그 기억때문에 행복했다. 거짓말처럼. 그들중 누구도 서로를 잊지 않았다.


드라마는 끝났다. 눈물을 흘리며 헤어지는 그들에게 마지막 위안처럼 한마디를 남겨두고 지난 7월 11일, 역삼역 근처의 한 레스토랑에 드라마 <거짓말>(KBS 2TV)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하나 둘 사람들이 모여 들었다. 천리안 소모임 '거짓말' 방의 사람들이다. 드라마 초기부터 작가 노희경의 거짓말처럼 빼어난 대사에 영혼을 뺏기기 시작하여 등장인물의 사랑의 방식에 울고 웃던, 그래서 온통 통신방을 뜨겁게 달구었던 열혈 시청자들. 그들이 드디어 사이버공간에서의 대화를 환한 현실공간으로 끌어내며 '아이디'대신 '얼굴'로 만나게 된 것이다.
중앙에 주인공 성우.준희.은수의 얼굴이 새겨진 커다란 걸개를 걸고, 가슴에 등장인물의 사진이 새겨진 명찰을 달고, 줄줄이 그들의 대사를 외우면서 만남은 무르익어 갔다. 수줍은 소년의 표정을 가진 연출자 표민수씨와 허스키한 목소리, 자그만 체구의 노희경씨와 아직 울먹이는 성우의 얼굴을 가진 배종옥씨가, 이미 끝나버린 '거짓말'이라는 하나의 코드로 시청자와 대화를 나누었다.

"처음 시작할때부터 단 한사람의 가슴에 남겨지더라도 시청률로 흔들리지 않기로 했다. '불륜의 사랑'이라고 손가락질만하지 않는다면, 정말 사랑이란 것이 용서와 희생과 신뢰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 표민수
분명 사랑은 있다
"근 열달을 거짓말에 빠져 살았다. '사랑은 없다'고 포기해 버린 사람들에게 분명 '사랑은 있다'라는, 거짓말 같은 진실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유부남인 준희와 미혼인 성우가 헤어지는 것이 방송의 한계이기 때문은 아니다. 궁극적으론 해피엔딩이다. 사랑의 기억으로 모두가 행복하니까" - 노희경
"정말 너무 울었다. 그토록 사랑하면서 왜 헤어지느냐고? 헤어질 수밖에 다른길이 없었으리라고 생각한다. 만약 같이 잤더라도 헤어지는 것이 옳은 길이었을 것이다. 성우는 자신의 사랑으로 다른 누군가가 상처를 받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 배종옥
"성우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 너무 아픈 사랑만 경험한다. 준희마저 성우를 두고 은수에게 돌아가버리면 그 사랑은 배신아닌가.진짜 사랑이 아니라 잠깐의 바람이었단 말인가" - 소모임
"그렇게 사랑한다면서, 왜 하루밤도 같이 잘 수 없었는가. 같이 자기라도 하면 사랑의 진정한 의미가 훼손되는가? 게다가 그들은 30대 전후의 성인이지 않는가. 몸을 통한 사랑에 대한 강박관념이 있는 것이다" - 소모임

시청률로 보면 큰 반향을 일으키지 못했던, 그러나 '컬트 드라마'라고 까지 명명되었던 드라마 <거짓말>. 소모임방 사람들은 드라마 재방송을 건의하고, 소설집으로 다시 펴내는 일, 삽입음악을 컴팩트 디스크로 만드는 일을 해나가기로 합의하고 모임을 닫았다.

아무도 가슴에 주홍글씨를 달지 않았다.
"사랑했기 때문에 헤어진다"는 진부한 이야기를 우리는 수도 없이 봐왔다.
얼마전에 막을 내린 <애인> 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자의 배우자에게 애정이 식어버린 유부남,유부녀가 만나 절절히 사랑하지만 귿어진 공식처럼 각자의 자리로 돌아갔다.
주인공중의 한 여자나 한 남자가 이미 결혼이라는 제도속에 들어가 있을 경우, 예외없이 그 사랑은 헤어짐을 택한다. 헤어지면서 그들은 말이 많다.

이루지 못한 사랑에 대한 변명중의 하나.
"당신을 원래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은 아주 많이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되뇌면서. 애초에 잘못된 사랑이었다고 중얼거리면서.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말라'는 경구는 불륜의 드라마에서 끊임없이 되풀이 된다. <거짓말>에서도 주인공 성우(배종옥)와 준희(이성재)의 사랑을 바라보는 하숙(김동주)이라는 선배의 간곡한 충고,
"그는 결혼한 사람이야. 길이 아니면 가지를 마." 그 길이 어떤 길일까.
누가 사랑을 말하면서 정해진 길로만 가는가. 드라마 <거짓말>에서 말하는 '길'의 의미는 뭘까?
<거짓말>에는 정상적인(?) 가족의 구성원이 거의 없다. 주요 등장인물들은 한두 가지씩의 결핍상태에 놓여있다. 성우엄마 영희(윤여정)는 과부, 남편과 사별했다. 그 남편은 살아생전 다른 여인을 사랑했다. 남편이 죽은 다음에야 영희는 그가 다른 여인에게 생의 마지막 편지를 남긴 것을 알아낸다.
성우의 새아버지가 되는 현철(주현). 영희가 이루지 못했던 첫사랑이다.
그도 부인과 사별하고 혼자 산다. 은수(유호정)를 사랑했던 동진(김상중)은 성불구자.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은수와의 사랑을 포기하고-우정이라는 다른 코드로 만나다. - 거리의 부랑아 세미(추상미)에게서 사랑을 느낀다.
동진을 사랑하는 세미, 양공주의 딸이다. 모진 그리움끝에 찾아낸 엄마는 세미를 보자마자 자살한다. 세미를 늘 따라다니는 장어(김태우). 정신이 온전치 못하고 병을 앓고 있다. 은수의 남편이자 성우를 사랑하게 된 준희.
은수때문에 교통사고로 손을 다치고 목숨같은 판화를 못하게 된다. 준희의 아내 은수, 먼 외국에 언니 하나밖에 없는 고아. 자궁에 육종이 생겨 아이를 낳을 수 없다. 남편보다 자신이 더 남편을 사랑한다는 갈증과, 그 남편을 닮은 아이를 낳을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슬픈 주인공 성우. 이전에 했던 사랑은 늘 불구의 사랑이다. 유뷰남이거나, 주체성없는 마마보이어서 상처만 남기고 사랑은 끝나버렸다. 거듭된 사랑의 실패로 세상에 '사랑은 없다'고 단정한다. 하지만 뒤늦게 얻은 사랑 준희도 유뷰남이다(이 남자가 세상에 '사랑은 있다'는 신뢰를 남기고 떠난다)
이 결핍된 사람들이 가고싶고, 가야만 할 사랑의 길이란 물론 그 결핍을 채울 '정상적(이라고 사회가 말하는)인' 길이어야 한다. 상처를 치유하려면 사회가 규정한 정상적인 길로 진입하는 방법밖엔 없기 때문이다. 결국 <거짓말>은 이 상처받은 영혼들이 '길이 아닌 길'을 접어 들어섰다가 '바른 길'로 돌아서 가기위한 눈물겨운 투쟁일 뿐이다.
정상적인 부부관계만이 용인받는 사회에서 상처투성이의 사랑을 얻기 위해 투쟁할 힌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니 결론은 해피엔딩이 될수 밖에 없다. 혼자된 영희와 현철은 재혼한다.
누구도 그들의 사랑을 비난하지 않는다. 동진도 세미와 사랑을 이룬다. 물론 부모에게는 세미의 출신 성분을 감추고 중국으로 떠난다. 세미의 출신이밝혀질 경우, 절대로 용납받을수 없고,이해 받을 수 없기때문에.
정상적이기 위해선 비정상적인 모습이 '적당히' 가려질 필요가 있다.
준희는 성우를 포기하고 아내곁에 남는다. 그는 착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내의 불임의 고통을 그대로 두고 매몰차게 떠날 수 없었다. 성우도 마지막에선 선을 본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준희와 비슷한 섬세한 구석을 느끼면서 마음문을 연다. 둘 다 미혼이므로 이 사랑을 방해 할 아무것도 없다.
여기서 소위 '정상적인' 가정을 이루기 위해 모든 등장인물이 피나도록 지킨 원칙이 있다. 그것은 '몸을 지키는 일'이다. 은수는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남편에게 바란 것은 애오라지 한 가지.
"그 여자와 자지는 마" 였다. 다 좋다는 것이다. 사랑해도 좋고 자기에게서 얻을 수 없는 기쁨을 얻어도 좋다. 그러나 '절대 자지는 마'를 외친다.
그런 모습은 <애인>이라는 드라마에서도 보여졌는데 유동근과 황신혜의 혼외정사가 불발로 끝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은 주인공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수도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된다.

다음 생에서 만나자는 말 말고
이건 방송의 한계가 아니라 우리사회를 이루는 많은 사람들의 의식 속에 번연히 살아있는 한계임에 틀림없다. 결국 준희는 은수곁으로 돌아가 웃을 수 있는 것도, 다시 돌아온 준희를 자기 남자로 받아들인 은수도, 새로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성우에게도 '몸은 깨끗하다'는 의식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지 않을까.
절대로 그들은 가슴에 '간음'이라는 주홍글씨를 달 행위는 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과정을 지켜보는 시청자들 역시 자기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쓸어 내린다.
그렇다면 선을 넘어선 불륜의 사랑은 어떻게 끝맺는가. 이전의 가정은 박살이 난다.
일본소설 <실낙원>에서처럼. 몸으로 만나게 된 후로는 이전의 가정으로 돌아갈 자리는 없다. '길이 아닌 길'을 간 사람이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기들만의 세계, 곧 죽음뿐이다.
그런 불륜의 결과를 너무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일까? 드라마의 등장인물들은 '사랑했다'는 아주 안이하고 행복한 결론, 이기적인 끝을 준비해 놓고 모두 '제자리(?)'로 돌아간다. 상처받지 않을 만큼의 사랑만을 나누어 갖고, 절대 목숨 같은 것은 내놓지 않고, '몸은 깨끗하다'는 당당한 이유를 달고원래의 자신들 자리로. 물론 아름답고 슬픈 사랑임에는 틀림없지만, 드라마는 무얼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찌보면 <거짓말>의 대단원이 옳을 수도 있다. 더 이상 파괴되지 않으려면, 죽음으로 끝나지 않으려면, 이쯤에서 헤어지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이 선택하는 가장 올바른 방법일 것이다. 사랑한 기억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아니 모두 행복해 졌다면 굳이 결혼이라는 도식적인 끝맺음은 오히려 구차스러울수도 있으므로.
하지만 그런 생각도 든다. 세상 어딘가엔 뒤늦게 진정한 사랑을 만나 둘이서 끝까지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을 거라고. 아름다울 수 있는 순간까지만 진행하다가 "여기서 그만" 하고 헤어지기보다는, 사랑의 많은 단계들,설렘, 두근거림,연민,이해,싫증,미움까지 그리고 더 나아가 따스한 이해에 이르기까지 겪어보는 사람도 있을 거라고 말이다. 옆자리를 비워두고 백년 후에 만나자는 그런 말 말고, 누군가를 아프게 하고라도 자신의 사랑을 지키는 사람도 있지 않을까. 어쩌면 그게 '진짜 거짓말'같지 않을까. '남산골 샌님 역적바라듯' 누구나 쉽게 거쳐갈 수 없는 길을 혹시 드라마에서라도 건너가 주길 바라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고 말하면 이것도 '거짓말'일까.
이젠 모를게 없다고 도튼 얼굴을 할 때마다, 생의 틈새에 새롭게 주어지는 과제들이 있다. 나이 탓인가. 집어드는 책마다, 온통 사랑에 빠져버린 사람들 이야기뿐이었고. 비밀이야, 비밀, 이라며 속삭이는 친구들마다 또 그렇고 그런 사랑이야기를 들려 주었고, 보는 드라마나 영화마다, 뒤늦게 찾은 사랑에 울고 헤어지는 이야기들뿐이었다. 이것도 생애 한번씩은 건너야 하는 통과의례인가. 재미있게 보고 듣고 읽었지만, 약간은 지겨워 졌다. 속살거리며 삶을 살짝살짝 건드리고 지나가는 그런 이야기들에 딴지를 걸어보고 싶었다. 목숨걸 필요는 없지만, 정말 아무 것도 걸지는 않는 '추억'뿐인 불륜의 사랑이 뭐가 그리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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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기사 (1999년 5월호)
신을진 기자

인터뷰- <거짓말>의 이성재
무색 무취, 평범해서 기분좋은 친구


세상에 존재하는 여러 가지 사랑의 색깔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는 드라마 <거짓말>에서 인테리어 디자이너 서준희로 분한 이성재는 단연 돋보인다.
<예스터데이> <지평선 너머> 등의 드라마에서 스타급 연기자로 발돋움한 그는 이 드라마에서 또 한 번 변신했다. 평범한 얼굴에서 여러 가지 이미지를 자유자재로 표현해 내고 있는 그의 진짜 매력.
1970년생, 우리 나이로 스물아홉. 위태로운 20대를 마감하고 푸르른 신록의 계절로 들어서려는 남자.
그러나 그에게서는 흔히 그 나이 또래의 사람들이 보여주는 치기어린 방황이나 불안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다.
일찌감치 결혼을 해서일까. 세 살 아래 부인과 이제 막 돌이 지난 딸아이와 함께 살고 있는 그는 어떤 유혹(?)이 닥쳐와도 끄떡없을 듯한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이런 남자가 드라마 속에서 연상의 여인과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진다니?

KBS 미니시리즈 <거짓말>
독특한 제목부터 시선을 끄는 이 드라마에서 이성재는 거짓말 같은, 그러나 진실한 사랑의 전형을 보여준다.
이 드라마에서 그가 맡은 역은 인테리어 토털 디자이너 서준희. 직장인보다는 예술가가 더 어울리는 남자로, 뉴욕 유학 중 만난 은수(유호정)와 결혼해 친구처럼 다정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러던 어느날, 직장 상사인 주성우(배종옥)와 사랑에 빠진다.
일반적으로 보면, 불륜이랄 수 있는 관계지만 그는 자신의 아내에게 사랑하는 여자가 생겼다고 고백할 만큼 어리석을 정도로 순수하다. 그의 연기를 보고 있자면. 새삼 사랑이 얼마나 슬프고 아름다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제가 한 그 어떤 작품보다도 어렵고 독특해요.
작품 들어가기 전에 PD선생님이랑 작가랑 얘기를 많이 했는데, 얘기하면 할수록 더 어려워져서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였어요. 감정의 깊이를 표현하기가 쉽지 않고, 대사도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게 많아요. 대본 읽으면서 ‘아, 어떻게 이런 표현을 쓸 수 있을까’ 절로 감탄하게 돼요. 슬픈 소설 봐도 별로 감동을 못 받는데, 드라마 대본보면 가슴이 울컹거리고 그래요.”
연기자들의 과장되지 않은 자연스러운 연기, 가슴을 울리는 아름다운 대사들과 리얼리티가 살아 있는 상황 설정 등으로 드라마 <거짓말>은 조용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예스터데이> <지평선 너머> 등으로 이미 낯이 익은 이성재는 그러나 이 드라마를 통해 이전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대중 앞에 섰다.
살이 빠져 더 갸름해진 얼굴, 짧게 치켜올려 깎은 머리, 코 밑과 턱 밑에 거뭇거뭇 자란 수염까지… 이전에 그를 눈여겨보던 사람들도 첫 방영 때 그를 알아보지 못하기도 했다.
의상도 검사역을 주로 맡으면서 입었던 양복을 벗고 편안한 니트와 헐렁한 바지로 바뀌었다.
웃음은 한결 편안해졌고, 눈빛은 더 애틋해졌다.
“예전의 이미지에서 스스로도 좀 답답함을 느꼈어요. 너무 모범생 같고, 무거운 그런 모습…
이번엔 역이 다른만큼 확실하게 변신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수염도 길렀어요. 넥타이 매는 옷 안 입어서 참 좋아요.”

모범생 단골, 깡패역 해보고 싶어
사실 그에게서 일반적인 스타들이 내뿜는 ‘끼’를 발견하기란 어렵다.
단정한 얼굴에 꾸밈없는 태도. 길거리를 가다 보면 심심찮게 마주칠 수 있는 기분좋은 인상의 그런 남자.
그가 처음 TV에 나왔을 때 사람들은 데뷔 초기의 한석규와 그를 비교하곤 했다. 평범해서 오히려 눈에 띄는 얼굴. 이성재 역시 한석규 선배를 가장 좋아하는 연기자로 꼽는다.
“제 얼굴이 평범해서 선한 이미지와 악한 이미지가 동시에 나올 수 있는 게 장점이라고 어느 연출가 선생님이 위로(?)해 주시더군요(웃음). 자연스럽고 편안한 연기자가 되고 싶어요. 과장되고 억지스러운 건 제가 봐도 싫거든요. 수재역도 해봤고, 검사역도 해봤으니 <넘버 3>의 한석규 선배처럼 깡패역을 한번 해보고 싶어요.”
<거짓말>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유호정과 배종옥은 모두 연기 선배이고 누나들이다.
그로서는 어려울 수밖에 없었는데, 주위 사람들이 ‘두 누나 때문에 힘들겠다’고 놀려댄다고.
유호정은 오산고등학교 2년 선배, 분위기를 좋게 하려는 그의 농담에 늘 ‘썰렁하다’고 핀잔을 줘 그를 슬프게 한다. 배종옥과는 촬영장 밖에서도 '사랑해’ ‘사랑해’하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대 선배이자 대학강사이기도 한 배종옥은 그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는 사람.
“이 드라마 하는 동안에는 애랑 놀지도 마라, 카메라 앞에서는 모든 게 다 드러난다고 선배가 그러더군요. 참 철저한 연기자라는 생각을 했어요. 연기를 위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태도를 배웠습니다.”
결혼한 남자가 느끼는 사랑, 그러나 그건 육체적인 끌림이나 이성적인 사랑과는 다르다.
인간에 대한 사랑이고, 그 사람의 아픔을 사랑하는 것인 만큼 깊이를 가늠하기 힘든 그런 사랑이다.
“상대방을 보면 괜시리 마음이 아파오는 그런 사랑이죠. 연기를 하면서 ‘정말 이런 일이 나한테도 생길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사람을 좋아하는 느낌은 누구나 가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그래도 실제의 저는 준희와는 다를 거예요. 전 제 것이 아니면 절대 손 안 대는 성격이거든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성장한 그는 지금도 일요일 날은 비가 와서 촬영이 취소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그래서 비가 오면 아이 손을 잡고 교회에 가는 크리스천이다.
부인을 만나고 나서는 다른 여자를 만나거나, 예전의 여자친구들을 만난 적도 없다.
그래서 ‘옛날 남자 친구 만나 저녁먹었다’는 부인의 말에는 괜시리 화를 내곤 한다.
만나서 저녁 먹을 일이 굳이 뭐 있냐고. 덕분에 부인으로부터 ‘쫀쫀한 남자’라는 핀잔을 듣는다.
<예스터데이>로 첫 주연을 맡으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끌 무렵, 그는 떳떳하게 자신이 ‘애딸린 유부남’임을 밝혀 여성팬들을 김새게 만들었다. 모 연예 프로그램에 나와 “제가 유부남이면 안됩니까?”라며 되묻는 그의 표정은 천연덕스러웠다. 연기로 승부를 봐야 할 배우에게 기혼, 미혼은 문제될 것이 없다는 생각에서였다.

대책없이 들어선 연기의 길, 보여줄 것이 많다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다니며 단역으로 출연했던 드라마 <큰언니>의 스크립터였던 부인 김진숙씨는 씩씩하고 통이 큰 여자였다.
드라마 대본을 받으러 갔다가 사람들과 어울려 식당엘 갔는데, 그 때 사람들이 둘을 보고 “잘 어울린다. 결혼해라”고 떠들어댔고, 두사람은 “그래 할게. 축의금 얼마씩 할래?”라고 장단을 맞췄다.
덩치크고, 배도 좀 나오고, 남자다운 남자를 평소 이상형으로 생각하던 김진숙씨는 그러나 그후 이성재와의 몇번의 데이트 끝에 그를 남편감으로 받아들였다.
결혼할 당시 이성재는 대학 4학년, 특별한 대책없이 저지른 일이었지만 95년 MBC 공채탤런트로 뽑히고 나서는 한달에 40만원 월급으로도 어깨가 으쓱해졌다. 이젠 수입도 더 늘어 가장으로서의 체면이 선다고. 이제 슬슬 둘째도 볼 생각이다.
그가 연기자가 된 것도 아주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였다.
사내답지 않게 곱상한 그를 두고 이모들이 ‘탤런트 시키라’고 하면 아버지는 ‘무슨 소리냐’며 호통을 치곤 하셨다.
진로를 결정해야 할 고3때, 그는 신학대학을 가겠다고 선언해 식구들을 놀라게 했다.
시간이 좀 흘러 그것도 시들해졌을 무렵, 대학진학 안내 책자를 뒤적이다 ‘연극영화과’를 발견하고 “이거다” 하고 혼자서 결정을 봤다. 이번에는 아버지도 ‘너 하고 싶은 거 해라’고 별로 만류를 안하셨다. 계속 반대만 하다 아들 하나 잘못 되겠다 싶은 걱정에서였을 거라고.
연기에 ‘연’자도 모르는 채 응시한 중대에서 고배를 마셨다. 다시 준비를 해 동국대 연극영화과를 들어갔다.
1학년 때 과 대표를 맡으면서 강의실 청소도 도맡아했다.
남들은 성실하고 착하다고 칭찬을 했지만 그는 즐거워서 한 일이었다.
연기자가 될 수 있다는 꿈은 그를 마냥 행복하게 했다.
대본을 외고, 카메라 앞에서 긴장된 마음으로 불이 들어오길 기다리는 순간은 지금도 그를 즐겁게 한다.
어느정도 자신감이 붙으면 영화에 도전해 볼 생각이다.
똑똑하고 완벽한 그런 인간말고, 뭔가 나사가 하나쯤 풀리고 결함이 많은 그런 인간형을 그려보고 싶다.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의 잭 니콜슨처럼, 또는 <시네마 천국>의 주인공처럼 인간미가 물씬 묻어나는 그런 향기로운 연기를 하고 싶다.
그는 아직 보여줄 것이 아주 많다고 했다.

“창간이 언제였죠?” “데뷔가 언제였죠?” 생년월일 대조를 시작한 기자와 배우.
알고 보니, 창간 4주년호 표지 모델 이성재는 올해 배우 4년차다.
한편의 영화로 ‘될 성싶은 나무’임을 입증한 그의 저력이 <씨네21>과 함께 차곡차곡 쌓여온 것임을 알고 나니, 더욱 친근감이 느껴진다.
탤런트로서는 이례적으로 스타덤 지을 차지한 지난해 여름의 이성재와 지금의 이성재가 달라진 점.고대하던 영화배우가 됐고 “트로피란 걸 처음 받았다.”
첫 영화 <미술관 옆 동물원>으로 대종상, 백상 예술대상, 춘사 예술상을 휩쓸고, 이제 충무로에서 가장 유망한 배우 중 한 사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달라지지 않은 점.
매니저는 여전히 없고, 어깨와 목에 힘도 주지 않는다.
“이미지 메이킹, 아직 필요성 못 느껴요. 유명세? 그런 거 없어요. 전혀.”
한여름을 방불케 하는 후덥지근한 스튜디오. 손에 꽃을 든 턱시도 차림의 이성재가 조명 아래서 ‘벙긋’ 웃는다.
이승에 두고 온 연인을 여전히 사랑하면서도, 실연의 복수를 하겠다는 동료 귀신에게 마음이 끌리는 칸토라테스.
<자귀모>에서 이성재는 <미술관 옆 동물원>의 철수와 완연한 대조를 이루는, 고지식하고 강직한 캐릭터를 맡았다.
<자귀모>가 해산하면, 바로 주유소를 털러 간다.
김상진 감독의 코믹물 <주유소 습격사건>에서 “못 말리는 꼴통” ‘노 마크’ 역을 맡아, 새로이 연기 변신을 시도할 예정. 이정향 감독 표현처럼 진짜 “물 같은 배우”가 되는 게 그의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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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미상)

사랑, 섹스, 그리고 거짓말

아무리 이성이 발달된 인간이라도 사랑앞에서는 맥을 못 춘다.
상대에게 정신없이 달려가는 가슴을, 머리가 따라 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우리는 '말도 안되는' 사랑에 빠지기도 하고, 사랑 때문에 인생을 포기하기도 한다.
마치 거짓말처럼.
드라마 <거짓말>의 배종옥과 작가 노희경이 그 복잡하고 해석 불가능한 사랑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친구처럼 살던 부부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남자는 사랑의 상처를 잔뜩 짊어지고 힘들어하는 한 여자를 만납니다. 그는 아내를 사랑하지만 자꾸만 자꾸만 그녀에게 마음이 가는 걸 느낍니다. 그들 세 사람에게 사랑은 고통입니다. 드라마 <거짓말>은 그 사랑의 고통을 조금의 여과없이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래서 너무나 슬픕니다.
"살아있는 동안 너는 나만 사랑한다고 나는 너만 사랑한다고 맹세할 때 난 신이 가장 무서운 존재인줄 알았어. 그런데 아니야. 세상에게 가장 위험하고 무서운건 사람 마음이야. 신앞에서 한 맹세도 마음 한번 바꿔 먹으니까 아무것도 아니잖아" (드라마 <거짓말>중에서)

노희경 : pc통신을 보니까 성우(배종옥)와 준희(이성재)의 사랑을 불륜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더라. 준희의 아내. 은수(유호정)가 피해자라는 거지. 과연 그럴까? 난 세 사람이 모두 피해자라고 생각해. 준희가 성우를 만났다고 해서 즐겁지 않았잖아. 늘 마음이 아프고 힘들었잖아. 성우도 그래. 자기가 준희를 얻었다고 언제 마음놓고 사랑해 본 적 있어? 그렇지 않잖아. 모두 다 아파. 불륜이라…글쎄 과연 성우와 준희의 사랑이 그렇게 나쁜걸까? 사랑은 그냥 다가오는 거잖아. 그리고 은수가 준희를 사랑하는 마음이 소중하다면 그리고 그게 은수의 사랑이라면 준희가 성우를 사랑하는 마음도 존중 받아야 한다고 생각해. 그건 준희의 사랑이니까. 준희가 결혼한 남자라고 해서 자기의 또 다른 사랑을 무시해야 한다는건, 너무하잖아.

배종옥 : 나도 동감해. 모두 아팠지. 만약 내가 진짜로 유부남을 사랑한다면 어땠을까? 그냥 포기할래. 난 고통스러운게 싫거든.

노희경 : 상처받기 두려워서 그럴거야. 아파하느니 아예 차 버리겠다는 거지. 난 아니야. 난 죽어도 내가 먼저 '가라'고 말 못해. 물론 남자가 나를 떠난다면 잡지 않겠지만.

배종옥 : 그렇게 붙든다고 마음이 편할까?

노희경 : 사랑을 떠나보내도, 떠나려는 사랑을 붙잡아도 마음이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야. 그렇다면 반대로 은수의 입장이라면 어떨 것 같아?

배종옥 :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아서 이런 말을 하는지는 모르는데 만약에 내 남편이 다른 여자 좋다고 한다면 난 그냥 놔 주겠어.. 이미 마음이 떠난 사람 잡아둬서 뭐하겠어. 바람둥이 남편을 둔 여자들이 그런 말을 하잖아. 다른 여자랑 몸은 섞어도 마음만 안가면 된다고. 그렇게 앞뒤 안맞는 말이 어디있어. 마음이 떠난 사람. 필요없어.

노희경 : 아니야. 그래도 끝까지 꼭 붙들어야 해. 사람들이 사랑하는 모습을 보면 참 제각각이야 다들 사랑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아. 매일 얻어맞고 사는 아내도 남편 곁을 떠나지 못하잖아. 우리가 보기에 도대체 왜 살까 싶지만 그 사람 나름대로 이유가 있어.

배종옥 : 그건 그래. 내 눈엔 아니다 싶다고 해서 그게 사랑으로서 부족하다고 말할 수는 없어. 사랑은 개인적인 일이야. 옆에서 어쩌고 저쩌고 말할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지. 섹스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야. 혼전에 섹스를 한다고 해서 그게 불결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물론 섹스에 사랑이 전제되어야 겠지만… 남이 어떤 사랑을 하는지 그런 것에 관심을 안가졌으면 좋겠어.

노희경 : 그래. 자기들이나 잘하라고 해. 사람들은 수학에 관심 없으면서도 굉장히 체계적이고 분석적인거 같아. 특히 남의 사랑에 관해서 어쩌면 그렇게 말들을 잘하는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하지. 결혼한 부부의 섹스는 도덕적이고 혼전관계를 맺는 연인의 섹스는 비윤리적인 거라고. 말도 안돼. 사랑하면 안고 싶고 뽀뽀하고 싶은게 자연스럽지 않아? 물론 스킨십을 하면 사랑의 감정이 몇 곱절 부풀려지기는 해. 만약 손만 잡은 남자와 섹스를 나눈 남자가 있다고 해봐. 그렇다면 대부분의 여자는 섹스를 나눈 남자를 더 사랑한다고 믿을거야. 헤어진 후에도 몸을 섞었던 남자를 더 강하게 기억할테고. 그래서 섹스를 나누기 전에는 신중해야 해. 둘이 나누는 사랑이 아니라 자기 혼자 키운 감정에 빠져서 헤맬 수가 있거든.

배종옥 : 도덕적이라는게 뭔지 모르겠어

노희경 : 결혼한 선배언니가 이런 말을 했어. 언젠가 슈퍼에서 물건을 사는데 주인 아저씨가 옆을 지나가더래. 그때 그 언니, 자기도 모르게 머리를 쓰다듬고,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는거야. 물론 그 행동에는 어떤한 성적 유혹도 담겨있지 않았겠지. 본능이야. 이성에게 좀 더 잘 보이겠다는 본능. 그렇다면 그 언니의 행동이 도덕적이지 못한 걸까? 외간 남자의 앞에서 머리카락을 만진게 상대에게 꼬리를 치는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을까? 글쎄…도덕적이다. 아니다, 라고 선을 긋는 건 참 힘들어. 스스로 물어보는게 제일 나을것 같아. 남의 사랑이 도덕적인지 아닌지를 따지기 전에 내 사랑은 깨끗한가 먼저 생각해 보는거지.

배종옥 : 윤리적과 비윤리적의 경계를 긋는 것 만큼이나 이것도 규정짓기 어려운거 같아. 뭐냐면 사랑하면 꼭 희생이니 배려니 하는 단어가 붙잖아. 그래서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면, 널 위해 희생할 수 있어 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 하지. 근데 난 그건 말도 안된다고 생각해. 왜 희생을 해. 그걸 얼마나 곱씹으면서 아까워하라고.

노희경 : 그래. 희생이란 말자체가 싫어. 희생이란 내가 너에게 이만큼 해주느라 난 이런 손해를 봤다, 라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 그것처럼 천박한 생각이 있을까. 일단 상대에게 준 건 잊어버려야 해. 그걸 죄다 기억했다가는 헤어진 뒤에 골치 아파지지. 준비하지 않고 사랑을 기다리는 사람, 벼락같은 사랑을 꿈꾸는 사람, 참 한심해.

배종옥 : 어렸을 때나 그런거 같아. 내가 너한테 볼펜 한자루를 선물했으니 너도 그에 해당 하는 선물을 줘, 라는 식의 유치한 물물교환말야. 설마, 나이 들어서도 그럴까

노희경 : 난 희생보다 더 싫은게 있어. 의심이야. 왜 사랑에 빠진 사람들은 상대를 의심하게 되는 걸까? 상대의 진심을 의심하고 사랑을 의심하고 미래를 의심하고 그건 자신없다는 의미 아닐까? 모든 게 의심스러운데 사랑은 뭐하러 하는지…

배종옥 : 상대에게 기대는 마음이 커져서 나중에는 혼자 설 힘조차 잃어서 그래서 상대가 자기를 떠나면 어쩌나 하는 걱정 때문에 자꾸만 의심을 하는거 같아. 인간이니까. 이해해. 하지만 그런 감정이 사랑을 피곤하게 만드는건 사실이야. " 넌 사랑이 아픈거라고 그랬지. 그건 사치야. 나는 너무 아파서 하루에도 열두 번씩 너무 아파서 이젠 더 아프기 싫어. 사랑이 니가 말한 그런거라면 죽을 때 까지 안해도 좋아"

노희경 : 평강공주와 바보 온달 얘기알지? 사람들은 평강공주가 똑똑해서 온달을 장군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하는데 난 안그래. 온달의 착한 마음이 평강 공주가 새로운 눈을 뜨도록 만든거야. 그래서 상대를 위하고 아끼고 격려할 줄 아는 사람으로 바꿔 놓은 거지. 사실 평강공주는 맨날 울기만 하는 울보잖아. 그런 여자가 무슨 매력이 있겠어. 사랑에 빠지면 사람이 변하는 것 같아. 잠을 10시간씩 자지 않으면 못살던 사람도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밤샘을 할 수 있게 되고 아침이슬 하나에도 감동 받게 되지.

배종옥 : 물론이야. 그 변화란 이루 말할 수 없어. 스스로 자신의 변화에 놀란 다니까. 근데 사실 난 얼마전까지도 사랑을 잘 몰랐어. 난 아버지를 일찍 여의어서 그런지 남자에 대한 기대치가 아주 커. 남자란 늘 완벽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그래서 상대가 작은 실수라도 하면 그사람에 대한 감정이 싹 사라져 버려. 포용력이 전혀 없었지. 결혼을 하고 이혼을 하면서 상대를 껴안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배웠어.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그부분은 약해. 그런데 요즘 난 사랑에 빠진 기분이 들어. <거짓말> 때문에. 드라마를 촬영하려고 집을 나서면 그렇게 가슴이 설렐수가 없어. 밤에도 잠 못자. 의상을 챙기고 확인하고 또 확인하고. 지금까지 이런 적없었어. 처음에 <거짓말> 촬영할 때 정말 힘들었어. 연기가 안되는 거야. 나는 한다고 하는데 사람들이 그게 아니라는 거야. 대본연습할 때도 대본을 읽을 수가 없었어. 자신이 없었거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어디로 뿅하고 사라졌으면 하는 심정.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정말 모를거야. 그렇게 아파하고 힘들어하면서 정을 붙여서 그런지 난 정말 이 드라마를 사랑하게 됐어. 내가 만약 자신 없다고 이 드라마를 포기했다면 어땠을까… 사랑을 하려면 오기와 배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 좌절하지 않고 일어설 수 있는 근성.

노희경 : 난 엄마때문에 사랑을 배웠어. 우리 엄마. 1년반동안 암투병하시다가 돌아가셨거든. 난 잠도 많고 무계획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사람인데 엄마 때문에 새벽 4시에 일어나 밥을 짓고 엄마가 보고 싶어서 밤을 꼬박 새우기도 하고 너무 만지고 싶고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어서 어쩔줄 몰랐어. 엄마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엄마의 기분을 다 알았지. 그리고 엄마의 기분이 좋으면 내기분까지 덩달아 좋아지고 엄마 때문에 내인생이 완전히 달라졌어. 맞아 . 화내기 전에 먼저 대화하는 법도 엄마 때문에 배웠어. 엄마에 대한 사랑이 남자에 대한 사랑과 다르다고 생각지 않아. 모든 사랑은 같은 느낌이야.

배종옥 : 사람들이 내게 "왜 재혼 안하냐"고 물어봐. 우선은 지금이 너무 행복하고 두 번째는 결혼생활을 잘해낼 자신이 없어서 그래. 내가 지금 행복한건 내가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하고 있기 때문이야. 그게 얼마나 큰 행운인데. 난 지금의 행복에 만족해. 재혼을 해서 더 행복해 질 수도 있겠지. 하지만 내게 그런 행운은 없다고 생각해. 지금도 충분히 만족하는데 얼마나 더 행복해 지겠다고 재혼을 하겠어. 그건 욕심이야.

노희경 : 사람들은 결혼을 참 중요시하는 것 같아. 사랑보다 더.

배종옥 : 결혼이란 사랑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사랑한다고 꼭 결혼해야 한다고는 보지 않아. 난 결혼에 대해서는 운명론자야. 결혼은 운명이고 인연이야. 모든게 맞아 떨어져야지 가능해. 난 결혼할 때, 결혼을 해야겠다는 느낌이 왔어 그런 느낌이 드는 상대를 만나야 그래서 인연이 닿아야 결혼할 수 있다고 생각해. 그리고 사랑하니까 결혼한다. ..그건 너무 극단적이야. 사랑만 할 수도 있잖아. 꼭 자기적으로 묶어두어야 하나?

노희경 : 그렇게 결혼, 결혼하면서도 막상 결혼하면 또 불만이 생기는 것 같아. 사람들은 사랑이 오랜기간 지속되면 그 색깔이 퇴색한다고 말하더라. 그래서 못보면 금방이라도 죽을 것 처럼 열병을 앓던 사람도 결혼한 후에는 권태기니 뭐니해서 상대에게 심드렁해지고 그런데 난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젊은 시절의 사랑이 열정과 섹슈얼한 느낌을 중요시 한다면 나이가 어느정도 든 이후의 사랑은 상대를 이해하는 감정으로 변해. 엄마들을 봐. 매일 남편보고 돈 못벌어온다고 구박하지만 누가 자기 남편을 욕한다면 그 꼴 못보지. 아마 도끼눈을 하고 남편 편을 들걸. 물론 사랑이 오래되면 애정표현이 줄어들 수는 있겠지. 하지만 매일 섹스를 하는 커플이 한달에 한번 섹스를 하는 커플보다 더 사랑하는 사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야 두 커플의 사랑무게는 똑같아. 우리언니가 결혼하더니 그러더라. 옛날에는 남자같던 사람이 이제는 남매같다고. 언니는 좀 서글픈 목소리로 말했는데 난 그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어.

배종옥 : 그럼 이건 어때? 사랑의 상처가 많은 사람과 상처가 없는 사람 둘 중 어느 사람이 좀 더 편안하게 사랑을 만날 수 있을까?

노희경 : 사람들은 사랑을 많이 하면 새사람을 만날 때 감동이 덜해진다고 생각하는 거 같아. 첫사랑에게 1백퍼센트를 주었다면 두번째 사람에게 그 절반을 주고 그 다음에는 또 절반의 사랑만을 주고… 나 그렇게 생각안해. 물론 기교는 늘겠지. '이렇게 하면 좋아할거야'하고 잔머리를 굴릴 수 있겠지. 그런 가벼운 기교만 늘지 않는다면 사랑은 많이 해보고 다쳐봐야한다고 생각해.

배종옥 : 난 아니야. 실패의 경험이 많은 사람은 사랑을 못믿게 돼. 상대를 전적으로 신뢰한다고 느끼지만 언젠가 그도 떠나지 않을까 경계하게 되지. 그러니까 자기 마음을 쉽게 남에게 주지도 못하고, 상처는 사랑에 도움이 안돼

노희경 : 난 예전에 신이 인간을 만들 때. 인간이 가장 아름다운 모습을 하는 20대로 만들지 뭐하러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부터 추하게 늙을 때까지 살도록 했을까 궁금했어. 그러다 답을 얻었어. 아기로 살면서 아기의 마음을. 20대로 살면서 20대의 마음을, 60대로 살면서 60대의 마음을 모두 알라고 했던 것 같아. 그래서 세상에 이런 마음 저런 마음이 존재하는 걸 느끼라는 거지. 마치 모든 것을 아는 신처럼 말야. 사랑도 마찬가지야. 마지막 사랑을 만날 때까지 만남과 이별을 반복하는건, 그 모든 감정을 느껴보라는 의미일거야. 불꽃처럼 타오를 때의 환희를, 이별후의 가슴아픔을, 행복과 기쁨과 슬픔 그런 모든 감정을 배우라는 거지. 그래서 난 사랑은 많이 해볼수록 좋다고 생각해. " 사랑은 교통사고 같은거다. 길 가다 어느 누구랑이나 부딪칠 수 있다. "

배종옥 : 내 후배 한 명은 참 많은 애인을 사귀었어. 근데 걔가 그러더라. 자기는 지금까지 헤어진 남자가 한 명도 없다는 거야. 헤어진 이후에도 전화해서 만나고 차마시고…친구로 지낸대. 애인이었다가 친구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

노희경 : 물론이야. 언젠가 아주 오래전에 사귀었던 남자를 몇 년만에 다시 만난 적이 있어. 근데 그 남자가 그러더라. 자기를 아직도 좋아하냐고. 그래서 렇다고 했어. 그 남자랑 다시 만나려고 그런게 아니고 . 말정도는 해 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슨 원수진 사이도 아닌데. 난 옛 애인에 대해 "그 사람 너무 지긋지긋해. 생각하기도 끔찍해" 라고 표현하는 사람들을 보면 가엾어. 사랑하지 않었던 거라고 생각해. 왜 옛사람을 부정하는 거지? 참 이상해.

배종옥 : 그건 그래. 나도 옛사람을 생각하면 '그사람, 이건 참 좋았는데' 라는 생각이 들어. 어느날 문득. 그 사람이 아련하게 떠오를 때도 있고.

노희경 : 사랑은 대충 하는게 아니라고 생각해. 그러기엔 인생이 너무 짧아. 그리고 사랑은 한번에 끝나는게 아니야. 사람들은 누구나 이번 사랑이 마지막이길 바라고 영원하길 바라지만 그렇지 못해. 사랑은 떠나기도 하고. 그 빈자리에는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오지. 사랑이란 상대의 아픔에 대한 이해같아. 아, 이사람이 이런 일 때문에 상처받고 아파하는구나. 내가 도와줄 수는 없을까? 뭐 그런 감정이지.

배종옥 : 맞아 아픈 사람을 보면 보호본능처럼 일어나는 감정. 동정하고는 다른 개념이지. 그치만 사랑은 너무 고통스러워 너무 아프고 힘들어.

노희경 : 그래도 사랑을 하잖아. 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끼고.

배종옥 : 고통 속에서 작은 행복을 발견하기 때문이겠지. 슬픔보다는 큰, 그러나 작은 행복. 그리고 사실 매일매일이 행복하다면 그 행복이 얼마나 가치있는지 모르잖아. 고통과 행복이 번갈아 와야 작은 행복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 알지.

노희경 : 맞아. 사랑을 하면 자기안에 있는 또 다른 자기를 발견하게 되고 세상을 여유롭게 바라보는 눈을 갖게 되고, 또….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굽히는 법을 배우게 되지. 그렇게 많은 변화를 겪는데 그깟 고통쯤은 참아야겠지. 안그래?

"사랑은 또 온다. 사랑은 계절같은거야. 지나가면 다신 안올것 처럼 보여도 겨울가면 봄이 오고 이 계절이 지나면 넌 좀 더 성숙해 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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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라이터 (1999년)
유재순 기자

<바보같은 사랑>의 여주인공 배종옥과 표민수 PD가 만나 허심탄회하게 나눈 ‘불륜의 사랑’
"바보같은 사랑을 해본 사람은 그 고통을 알기에 두 번 다시 못할 거예요"


KBS미니시리즈 <거짓말>과 <바보같은 사랑>에서 연이어 연기자와 연출자로 만난 배종옥과 표민수 PD. 이들은 두 드라마에서 불륜의 사랑이야기를 맛깔스럽게 담아내 시청자들의 가슴을 울렸다. 불륜의 사랑은 어디까지나 불륜일 뿐인가. 서른일곱 살 동갑내기인 두 사람이 만나 이에 대해 솔직한 생각을 이야기 했다.
소설 <우묵배미의 사랑>을 극화한 드라마 <바보같은 사랑>에서 호흡을 맞추고 있는 탤런트 배종옥과 표민수 PD. 감각적인 영상과 내면을 파고드는 세밀한 연출의 대명사로 불리는 표민수 PD는 단막극 <깊은 바다>를 시작으로 <스타> <사람의 집> <거짓말> <슬픈 유혹> 등을 연출했다.
특히 지난해 방영된 <슬픈 유혹>은 동성애를 깔끔하게 다뤄 시청자들의 눈길을 사로잡았고 <거짓말>은 98년 방영 당시 PC통신에 동호회가 생길 정도로 마니아들의 격찬을 받았다.
연기 잘하기로 소문난 탤런트 배종옥과 표민수 PD가 처음 호흡을 맞춘 작품도 <거짓말>. 높은 시청률을 기록하지는 않았지만 <거짓말> <바보같은 사랑>을 통해 마니아들을 확보하고 있는 두 사람이 오랜만에 촬영현장을 벗어나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앉았다.

배종옥:(이하 배) 감독님. 어제 잠이나 제대로 주무셨어요? 전 촬영을 마치고 집에 가면 쉴 수 있지만 감독님은 하실 일이 많잖아요?

표민수:(이하 표) 지금도 일하다가 나왔어요. 얼굴이 말이 아니죠?

배: 네, 좀 피곤해 보여요. 하지만 저도 요즘 촬영할 때 고통스럽고 아파 보이지 않나요? 재작년에 <거짓말>을 할 때도 30대 후배 유부남을 사랑하는 여자였잖아요. 지금 하고 있는 <바보같은 사랑>도 불륜이고요. 드라마 속 인물에 빠져 몰두해서 그런지 연기하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 마음 이해하시겠어요?

표: 주인공 옥희의 감정을 안고 있기가 힘들다는 거 알아요. 얼굴에 그게 나타나요.

배: 그래요. 사람들은 왜 그렇게 힘들고 고통스런 사랑을 할까요? 드라마를 촬영하는 내내 무거운 돌덩이 하나가 짓누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에요. 연기하면서 느끼는 감정이 이런데 사람들은 왜 불륜을 저지를까요?

“바보같은 사랑, 만들고 연기하는 것만으로도 고통스럽다”

표: 이런 말 있잖아요. ‘남이 하면 불륜이고 내가 하면 로맨스’라고. 드라마에서 불륜으로 비쳐진 사랑을 시청자들 자신이 직접 하게 되면 사랑으로 바라보지 않을까 싶어요. 내가 하면 로맨스가 되는 것처럼. 일종의 대리만족이죠. 배종옥씨에게 불륜의 사랑이 찾아오면 어떨 것 같아요?

배: 전 그런 불륜의 상황이 오기 전에 막아버리고 싶어요. 너무 고통스러워서요. 남의 가정을 파탄시키면서까지 그렇게 하고 싶을까요. 드라마 속에서 유부녀가 유부남을 사랑한다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힘들고 고통스러운데 현실 속에서는 어떻겠어요? <바보같은 사랑>에서는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때문에 가정이 있는 두 남녀가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손잡고 도망가잖아요.

표: 촬영현장에서 그런 말 했었죠? 사랑하는 남자의 손을 잡고 몰래 도망가는 신을 찍을 때 실제로 배종옥씨 가슴이 막 아파온다고요.

배: 그랬어요, 정말. 사랑 하나 믿고 도망가서 아주 작은 단칸방에서 둘이서 살아보겠다고 못질하고 도배하는 장면을 찍는데 ‘이 두 사람이 앞으로 어떻게 살까’ 하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무거워지면서 머리속이 아득해지대요. 현실에서 나는 그런 사랑 못할 것 같아요. 아니, 안 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세상 일 다 잊어버리고 사랑 하나만 믿고 떠난 두 사람이 행복했으면 좋겠다’하는 생각도 들고요. 불륜이라고 불리는 사랑이지만 두 사람은 목숨 걸고 사랑하잖아요.

표: 내가 만약 드라마 속의 남자 주인공 같은 상황에 처한다면 다시 아내에게로 돌아가서 고통스런 사랑은 떨쳐 버리고 예전처럼 살 것 같아요.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할 것 같아서죠. 불륜의 사랑을 하면 늘 ‘혹시 아는 사람들이 보면 어떻게 하나’ ‘동료들이 알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 속에서 살아야 하는데 견뎌낼 재간이 있겠어요?

배: 남의 눈을 의식한 불안도 있겠지만 불륜 자체의 불안도 있다고 봐요. ‘이 남자가 아내와 가정을 핑계로 돌아서면 어쩌나’ 하는 조바심이 늘 잠재해 있잖아요. 마음이 안정되질 않는 거죠. 그게 불륜의 본모습 같아요.

표: 나에게 그런 사랑이 찾아온다면 세상 사는 게 너무 두려울 것 같아요. 사랑 하나 때문에 세상을 등질 수는 없잖아요. 불륜은 어떻게 보면 게임이죠. 이것을 취하고 다른 것을 버리는 게임이오.

배: 불륜을 하면 못하는 게 있대요. 드라마 <거짓말>에서 윤여정 선배님이 했던 대사중에서 ‘그 사람의 손을 잡기가 힘들다, 집에 전화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그리고 내가 보고 싶을 때 항상 볼 수 있지 못하다’라는 대사가 있었어요. ‘항상 볼 수 없다’가 아니라 ‘항상 볼 수 있지 못하다’, 그 말이 더 가슴에 와 닿았어요.

표: 항상 볼 수 있지 못하다….

배: 현실에서는 정말 행복한 사랑을 하고 싶어요. 내가 그 남자와 있는 것이 정당하고 축복받는 그런 사랑 말이에요. 드라마를 하기 전에는 ‘불륜에 빠질 수도 있다’고 생각했고 ‘사랑하는 사람이 결혼한 사람이라면 그렇게라도 할 수밖에 없겠구나’ 하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극중에서 고통스럽고 쓰라린 불륜을 체험하고 보니 ‘나는 이런 사랑은 너무 고통스러워서 할 수 없겠구나’ 싶어요.

표: 남편 또는 아내 몰래 바람을 피우면서 생활에 활력소가 된다고 하는 사람들 있잖아요. 변화도 없고 대화도 부족한 결혼생활에서 느끼는 공허함을 채우기 위해 불륜을 하는 사람들이오. 서로의 가정은 지켜주면서.

배: 저는 정말 그런 사람 많이 봤어요. 가정에 안주하지 못하고 방황하면서 다른 사람을 만나는 사람들요. 그럼 뭐가 좀 나아지나요? 남편 없는 나도 가만 있는데(웃음). 제 친구 중에 남편에 애인, 남자친구까지 있는 친구가 있어요. 그런데도 그 친구를 보면 늘 불안해요. 인생은 누군가에 의해서 즐거워지는 것이 아닌 모양이에요. 가정에 불만이 있더라도 만족하려고 애쓰면서 사는 게 훨씬 가치 있지 않을까요?

표: 맞아요. 안 그러면 남편은커녕 애인도 없이 살고 있는 사람 열 받게요(웃음).

“불륜의 사랑을 하면 마음놓고 싸울 수도 없대요”

배: (갑자기 생각난 듯) 감독님. 방송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던 사건 기억하세요? 이 얘기하면 그 언니가 놀랄 거야. 방송국 분장실에 있는 언니였는데 동료직원하고 같이 도망갔잖아요. 유부남, 유부녀였는데.

표: 아, 그 사건이오? 한날 한시에 출근했다가 오후에 동시에 없어졌잖아요. 그날 두 사람이 다 집에 안 들어가서 식구들이 방송국으로 찾으러 왔었어요. 그 바람에 방송국 사람들도 두 사람이 도망간 거 알게 되었고요. 양쪽 다 집에서 눈치채지 못했다면서요. 평소에 너무나 가정적이었다고 하던데.

배: 그 언니는 딸이 둘이고, 남자도 애가 하나 있었대요. 아이들도 버리고 직장도 버리고 돈도 없이 진짜 ‘바보같은 사랑’을 한 거죠. 그 얘기 듣고 너무 놀랐어요. 그 언니가 애들을 얼마나 사랑했는데요. 그런 아이들까지 버리고 남자랑 도망을 갔다는 게 안 믿어지더라고요

표: 방송국 사람들도 다 놀랐죠. 어쩌면 그럴 수 있을까, 얼마나 사랑했으면 그랬을까 하면서요.

배: 포항에선가 어떤 조연출이 숨어 살던 두 사람을 우연히 만났대요. 그 조연출은 두 사람이 도망가서 숨어 사는 줄도 모르고 촬영이 있어서 왔나 보다 하고 같이 저녁식사를 했대요. 서울에 와서야 그분들이 도망간 걸 알고 기겁을 했다는 거예요.

표: 두 사람은 평생 숨어 살아야 되잖아요. 차라리 각자 가정에 ‘이런 사랑을 선택한 나를 인정해 달라’고 말했으면 떳떳하게 살 수는 있었을 텐데. 그런데도 사람들은 ‘바보같은 사랑’을 하잖아요. 요즘 전 <바보같은 사랑>의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 중이에요. ‘아직도 바보같은 사랑을 하는 바보같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내레이션으로 처리할지 아니면 자막으로 처리할지.

배: 감독님. 올해 결혼 4년째라고 하셨죠? 그런데 두 분은 행복하게 잘 살면서 왜 그렇게 사람들에게 상처주는 슬픈 사랑만 만드세요?(웃음) 두 분이 사랑하니까 혹시 그 틈으로 어떤 사랑이 찾아오면 어떤 느낌이 들까 하는 상상을 위해서 드라마를 만드는 건 아니시죠?(웃음) 그러다가 진짜로 그런 사랑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시려고요?

표: 드라마에서 그런 사랑을 너무 많이 연출해서 찾아오기나 하겠어요?(웃음)

배: 그래도 만의 하나 그런 사랑이 찾아오면 어떻게 하실래요?

표: 드라마를 연출하면서 보니까 정말 고통스럽던데, 뭘…. 이러면서 피하겠죠. 드러내 놓고 만날 수도 없고 같이 있고 싶어도 제약을 받아야 하고. 보고 싶은 거 참는 고통도 만만치 않잖아요?

배: 난 연기를 통해서 나누는 사랑인데도 하다 보니까 너무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이런 고백해도 되나 몰라요. 두 분 사는 거 보면 저 결혼하고 싶어요, 솔직히. 너무 부럽거든요. 그런데 그런 복은 나한테 없는 거 같으니까 안 해요. 아니, 못한다는 표현이 맞나?(웃음) 그런데 어떻게 만났어요. 두 분은?

표: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났는데 첫눈에 맘에 들더라고요. 첫날 만나고 헤어질 때 다음날 그냥 만나자고 하기가 멋쩍어서 ‘내일 바지 하나 사야 하는데 좀 골라주세요’ 그랬어요. 집사람이 디자이너거든요. 바지 사고 그냥 보내기가 뭐해서 향수 세트 사주면서 바지 골라줘서 고맙다며 다음날 또 만나자고 했죠. 세번째 만난 날은 드라마 장소로 쓸 카페 몇 군데 헌팅 가야 되는데 같이 다니자고 했어요.

배: (웃음) 조연출일 때 그랬나 봐요. 보통 사람들은 결혼과 동시에 ‘폼잡는’ 걸 그만두잖아요. 그런데 불륜의 사랑을 하면 오랫동안 ‘폼’을 잡아야 할 것 같아요. 잘 보이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예뻐 보이려고 노력하고. 그런데 두 분은 부부싸움 안 할 거 같아요.

표: 안 하긴요. 아주 사소한 일로 싸워요. 라면이 덜 삶아졌다면 ‘당신은 내 식성도 몰라’ 그러고 아내는 ‘내가 남편 식성을 뭘 몰라?’ ‘봐 봐, 라면이 팍 불었잖아’ ‘씻고 있다가 그렇게 불었잖아’ 이러면서 싸우다가 결국 각방까지 쓰게 되죠. 그러다 슬그머니 일어나 아내 옆에 가서 ‘뭐하냐? 뭐해’ 이러면서 접근(?)하죠. 요즘은 집사람이 불만이 많아요. 늦게 들어가거나 집에 못 들어가서.

배: 감독님, 불륜 남녀 사이에는 별로 다툼이 없는 거 아세요? 서로 마음 상한 일이 있어도 부부처럼 드러내 놓고 솔직하게 싸울 수가 없는 거죠. 바람 앞에 있는 촛불처럼 불안한 사랑이 사소한 다툼으로 꺼져 버릴 수도 있잖아요. 불안하지 않은 사랑, 누구나 인정하는 사랑, 그런 사랑을 해야 하는 거 아닐까요?

표: 그런 사랑을 찾아 나서 봐요.

배: 사랑을 안 찾는 건 아니예요. 축복받는 사랑을 하고 싶은데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그냥 지금 생활이 좋아요. 일하고 공부하고 애 키우고 그냥 이런 생활에 만족해요. 가끔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외로움이 누군가에 의해 해결되고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엄마는 커튼만 고르지 말고
좋은 남자나 고르라는데, 글쎄…”

표: 저랑 동갑 맞죠? 용띠. 서른일곱.

배: 맞아요. 참 우리 <거짓말>이라는 작품에서 처음 만났잖아요. 감독님이 왜 저를 캐스팅하려고 했었는지 늘 궁금했어요.

표: 제가 첫 작품 연출할 때 주연은 아니고 잠시 출연해 달라고 했었잖아요. 그 때 배종옥씨는 대학원 논문준비 한다면서 정신적으로 여유가 없어서 안된다고 했어요. 두 가지 일을 병행할 수 없다고요. 그러다가 제가 한 카페에서 캐스팅 때문에 탤런트 윤유선씨를 만나고 있을 때 우연히 그 카페에 들른 배종옥씨를 처음 만났죠.

배: 아, 맞다. 그런데 처음 감독님 만났을 때 솔직히 감독님 같지가 않았어요. 웃는 얼굴에 너무 유순하게 생겨서 저런 분이 어떻게 작품을 할 수 있을까 싶었다니까요. 작품을 만들려면 결단력이 필요한데 사근사근하게 ‘이랬어요? 저렇게 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하는 걸 보니까 걱정이 되더라고요. 그런데 같이 일하면서 현장진행도 빠르고 감정 하나 하나를 놓치지 않는 걸 보고 마음이 놓였죠. 그러니까 좋은 작품이 나오고요.

표: 배종옥씨를 만난 게 행운이었어요. <거짓말>의 성우역이나 <바보같은 사랑>의 옥희 역에 더 이상의 배우는 없었다고 확신해요. 이번에 옥희 역할 하면서 처음으로 파마를 했다면서요?

배: 파마하고 드라마 출연한 거 이번이 처음이에요. 채은이도 엄마의 그런 모습이 우스운가 봐요.

표: 저는 아직 아이가 없어서 모르겠는데 밤샘 촬영하고 집에 가면 채은이한테 미안하지 않나요?

배: 솔직히 말하면 일할 때는 채은이가 신경 쓰이지 않아요. 엄마가 계시니까요. 쉬는 날은 채은이랑 같이 있죠. 엄마말로는 제가 항상 같이 있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면 채은이가 이해한다고 하더라고요. 벌써 초등학교 1학년이거든요. 저도 학부모예요, 벌써.

표: 처음 같이 일할 때 ‘아이는 아이고, 일은 일이야’라고 말하는데 조금 냉정해 보이고 차가워 보였어요. 그런데 옆에서 지켜보니까 역시 엄마는 엄마더군요. 잠시 쉬는 시간에 채은이에게 전화해서 애가 지금 뭐 하는지 미주알 고주알 물어보면서 깔깔대고 통화하는 모습을 보니 ‘천상 엄마는 엄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요즘도 촬영 스케줄이 없는 날은 항상 집에 있던데.

배: 일할 때는 어디에 중점을 두고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일할 때는 엄마라는 것을 떠나서 일에 중점을 둬요. 가정은 기본적으로 중요하잖아요. 가정이라고 해봐야 엄마랑 채은이 이렇게 셋이지만. 쉬는 날은 채은이랑 같이 놀아요. 딱히 밖에 나가서 할 일도 없고요. 채은이가 언젠가 그래요. 엄마가 배우라서 싫다고요. 밖에 있는 시간이 많으니까 그런 것 같아요. 그래도 “엄마가 배우라서 좋은 점도 있지 않느냐”고 했더니 그렇긴 하대요. 밖에 같이 나가면 날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기분 좋은 모양이에요. 그리고 엄마가 배우여서 남들보다 풍족할 수 있다는 점을 설명해 줬더니 고마워하더라고요. 아이도 엄마가 왜 일을 하는지, 해야만 하는지 알아야 이해할 수 있잖아요.

표: 일할 때는 철저하고 흐트러짐이 없어 보였는데 전에 백화점에 촬영하러 갔다가 예쁜 그릇을 한참 들여다보고 사는 걸 보고 ‘아, 엄마나 살림하는 여자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똑부러지게 일하고 빈틈없어 보이는데 천상 여자고 엄마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니까요.

배: 어떤 날은 집에 가만히 있으면 커튼이나 침대 커버가 우중충하게 느껴질 때가 있어요. 그러면 다 바꿔요. 하루는 엄마가 그러는 거예요. ‘종옥아, 이런 데 신경쓰지 말고 그냥 좋은 남자나 만나라. 맨날 이쁜 커튼이나 이불 고르지 말고 맘에 맞는 남자나 고르라’고요. 그런 내 모습이 엄마가 보기에는 안타까웠나 봐요. 그런데 전 그런 게 좋아요.

표: 엄마 말씀대로 커튼이나 바꾸지 말고, ‘이쁜’ 사랑 찾아보세요.

배: 그런 사랑이 다시 찾아올까요? 전 <바보같은 사랑> 마치면 채은이와 엄마랑 여행갈 거예요.

표: 어? 우리도 여행가기로 했는데. 어디로 갈 거예요?

배: 제주도로 갈까 생각중이에요.

표: 잘하면 제주도에서 여행중에 뵙겠군요.

배: 어, 그러면 안 되는데. 두분 행복하게 여행하는 모습보고 샘 나면 안 되는데….

표: 하하하. 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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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먼동아 (2008년 02월 22일)
송화선 기자

배종옥
대체할 수 없는 매력


배종옥은 ‘배종옥’이다. 20대 초반 당차고 세련된 도시 여성의 상징으로 브라운관에 모습을 드러낸 뒤부터 지금까지, 그는 줄곧 다른 누구와도 비교되지 않는 그만의 향기를 풍겨왔다. 또박또박 쏟아내는 말투와 선명한 눈빛, 야무진 입매 너머 어딘가에 있는, ‘배종옥을 배종옥이게 하는’ 무엇, 그가 밝히는 ‘배종옥 스타일’을 듣기 위해 그를 만났다.

배종옥(44)이 돌아온다.
지난해 여름 방영된 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 이후 한동안 모습을 볼 수 없던 그가 2월부터 방송되는 MBC 새 주말드라마 ‘천하일색 박정금’으로 안방극장에 복귀하는 것. 배종옥은 이 작품에서 이혼 후 홀로 아이를 키우는 형사 ‘박정금’ 역을 맡았다. 40대 중반 여배우가 자신의 배역을 드라마 제목으로 삼은 작품의 주연을 맡는 건 극히 드문 일. 게다가 ‘박정금’은 극중에서 두 남자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멜로의 주인공이다. ‘천하일색 박정금’을 통해 배종옥은 중년 여배우의 연기 지평을 한 차원 넓히고 있는 셈이다.

▼ First keyword ; 고·집
“오늘의 저를 만든 건 아무리 힘들어도 나를 버리지는 않겠다는 고집이에요”

“행운이죠. 이 나이 될 때까지 ‘누구 엄마’ ‘누구 이모’가 아닌 개성 뚜렷한 배역을 맡을 수 있는 건 배우로서 제가 가진 최고의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저는 오래전부터 작품을 선택할 때 비중보다 역할의 개성을 중요하게 생각해왔는데, 그게 지금껏 연기를 계속할 수 있게 한 힘이 된 것 같아요.”
배종옥은 예의 ‘배종옥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비음 섞인 목소리와 문장의 어미까지 또렷하게 발음하는 말 습관은 그의 트레이드마크. 배종옥은 이 말투만큼이나 뚜렷하게 그가 등장하는 모든 작품에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왔다.
이번에 맡은 ‘박정금’도 기존 경찰 드라마의 주인공과는 확연히 구별되는 인물. 젊고 힘있는 형사가 아니라 먹고살기 위해 일하는, 한때는 ‘정의구현’을 꿈꿨지만 남편의 외도로 이혼한 뒤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서 점점 꿈을 잃어가는 ‘생활인’이다.
“제게도 ‘박정금’처럼 휘청대던 때가 있어요. 그래서 대본을 보는 순간 공감이 갔죠. 96년 드라마 ‘목욕탕집 남자들’에서 막 깐깐한 노처녀 역할을 한 뒤였는데,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제게 주어지는 역할이 그런 노처녀 아니면 ‘아줌마’밖에 없더라고요. 젊은 시절부터 좋은 배우가 되겠다는 꿈 하나로 정신없이 달려왔는데, 이제 먹고살기 위해 저 길로 들어서야 하는 걸까, 아니면 어떻게든 고집을 부려 나를 지킬 것인가, 혼자 고민하며 한참을 방황했죠. 그때 저 역시 이혼하고 혼자 아이를 키우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박정금’의 마음을 더 잘 이해할 수 있었어요.”
배종옥은 그때부터 98년 드라마 ‘거짓말’에서 연하의 유부남과 금지된 사랑에 빠져드는 ‘성우’ 역을 맡을 때까지 2년여의 시간이, 자신의 삶에서 가장 길고 끝이 보이지 않는 슬럼프였다고 말했다. 이제는 기억조차 할 수 없는 몇몇 작품에서 평범한 배역을 맡기도 했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매너리즘에 빠지는 걸 느낀 뒤 더 이상 개성 없는 아줌마 역은 하지 않겠다고 결심했다고.
오늘 배종옥이 시장 바닥의 억척스런 생선장수(드라마 ‘꽃보다 아름다워’), 스무 살 딸을 둔 엄마(영화 ‘허브’), 심지어 남편의 외도 앞에 무너지는 가정주부(드라마 ‘내 남자의 여자’)를 연기하면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아줌마’ 틀에 갇히지 않는 중견 여배우로 살아남은 건 그때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기적처럼 ‘거짓말’을 만났죠. 사실 ‘거짓말’은 제게 올 작품이 아니었어요. 노희경 작가와 표민수 PD가 황신혜씨를 염두에 두고 준비한 드라마였거든요. 그런데 그분이 이런저런 이유로 거절하면서 ‘성우’ 역을 맡을 배우가 없어진 거예요. 하는 수 없이 다른 배우들과 접촉했지만, 당시 변변한 연기를 하지 못하고 있던 저는 아예 물망에도 올리지 않은 상태였죠.”
지인을 통해 작품 이야기를 전해들은 배종옥은 자신이 그 배역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먼저 제작진에게 연락해 “그 역을 맡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고. 그러나 한참 동안 연락이 오지 않다가, 드라마 시작 2주를 앞두고 주요 배역 가운데 마지막으로 그가 캐스팅됐다.
“끝까지 다른 배우를 찾았는데 잘 안된 거예요. 그래서 방송 초반엔 PD · 작가와 사이가 좋지 않았죠. 그들이 생각한 주인공의 상이 있는데, 제가 그걸 충족시켜주지 못했으니까요. 한번은 촬영장에서 우연히 마주친 노희경 작가가 제게 달려들어 ‘연기 좀 똑바로 하라’며 목을 조른 적도 있어요.”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랜 세월 ‘연기에 대한 열망’을 꾹꾹 다져온 배종옥의 개성이 빛을 발했고, ‘거짓말’은 우리나라 최초로 드라마 동호회가 만들어질 만큼 큰 사랑을 받은 마니아 드라마가 됐다. 그리고 배종옥은 “‘거짓말’을 통해 배우로 다시 태어났다”.
“사람들은 제가 죽 작품성 있고 개성 강한 연기를 해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지금의 이미지는 ‘거짓말’ 때부터 만들어진 것 같아요. 그때 제가 품었던 열정, ‘이 작품에서 내가 가진 모든 것을 보여주지 못하면 다시는 연기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느꼈던 절박함이 새로운 삶을 열어준 거죠.”
그래서 배종옥은 자신을 배종옥이게 하는 첫 번째 키워드로 고집, 열정을 꼽았다. 세상과 타협해 그럭저럭 살아가지는 않겠다는 고집, 그리고 그 고집을 실현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쏟아붓는 열정은 지금도 배종옥을 그답게 지켜주는 두 가지 축이다.
그는 지난 94년 결혼했다가 1년 만에 이혼한 뒤 혼자 키워온 딸 채은이(13)에게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좋은 선물도 ‘최선을 다해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미국에 유학 가 있지만, 함께 살 때는 둘이 참 얘기를 많이 했어요. 작품하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때를 빼고는 늘 같이 수다를 떨며 친구처럼 지냈죠. 아이라는 이유로 감추거나 꾸미는 것 없이, 제 모습을 있는 그대로 다 보여줬고요. 저는 채은이가 그런 저를 보며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면 아무리 힘들어도 힘들지 않게 살 수 있구나’라는 걸 느끼길 바라요. 그래서 언젠가 저처럼,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일을 찾길 바라죠.”

▼ Second keyword ; 여·자
“엄마, 딸, 그리고 수많은 여자에게 둘러싸인 ‘여자’로서의 삶”

딸 얘기를 시작하자 이내 배종옥의 얼굴 가득 웃음이 번졌다. “제가 재밌는 얘기 해드릴까요?” 하며 딸과 관련된 에피소드를 들려주기도 했다. 채은이는 지난해 여름방학 때 한국에 돌아와 국토순례 대장정에 참가했다고 한다. 한창 우리나라에 ‘내 남자의 여자’ 열풍이 불고 있을 때였다.
“걔는 미국에 있으니까 그때까지 드라마가 얼마나 인기 있는지 모르는 상태였어요. 제가 국제전화로 ‘엄마 요즘 짱 잘나가~’ 그러면 ‘그래?’ 하며 웃어넘기곤 했죠. 그러다 국토대장정을 하면서 처음으로 사람들이 ‘내 남자의 여자’ 얘기하는 걸 들은 거예요. 아이들이 ‘요즘 그거 정말 재밌지?’ 하고 수다를 떨기에 자기도 ‘우리 엄마가 거기 나와’ 하며 끼어들었대요.”
채은이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거기서 ‘지수’가 우리 엄마야”라고 하자 잠시 정적이 흐르다 바로 난리가 났다고 한다. 아이는 배종옥에게 그 얘기를 전하며 “사람들은 엄마가 굉장히 잘나가는 배우인 줄 아나봐”라고 말했다고.
“그래서 제가 ‘그런 줄 아는 게 아니라, 엄마가 정말 잘나가는 배우야’라고 했어요(웃음). 집에서 매일 트레이닝복 입고 머리 질끈 묶고 있으니 아이 눈엔 제가 배우로 안 보이는 거죠. 그렇게 저를 그저 ‘엄마’로 생각하고, 편하게 대하는 ‘내 아이’가 있는 게 얼마나 좋은지 몰라요. 채은이가 제 작품을 보고 ‘좋다’고 말해주면 세상 누구의 인정을 받은 것보다 더 힘이 나죠.”
배종옥이 자기 삶의 또 다른 키워드로 생각하는 건 이렇게 소중한 딸을 포함한 ‘여자’다. 6남매 가운데 막내로 어머니가 마흔둘일 때 늦둥이로 태어난 그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고 한다. 이후 결혼 전까지 죽 어머니와 함께 살았고, 1년여의 짧은 결혼생활을 끝낸 뒤 딸과 함께 돌아간 곳도 어머니의 품이었다. 지난 2002년 11월 어머니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녀 3대가 함께 살았던 배종옥은 그 시절을 ‘행복했다’고 기억했다.
“제가 재혼을 하지 않은 건 제 삶이 그 자체로 행복했기 때문이에요. 짧은 결혼생활 동안 제가 결혼과 잘 맞지 않는다는 걸 배우기도 했고요. 지금도 제가 좋아하는 일이 있고, 우리 딸이 있으니 굳이 다시 결혼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요.”
그는 사회에서도 ‘여자와의 삶’에 익숙하다. 배종옥을 연기자로 새롭게 태어나게 한 드라마 ‘거짓말’ 이후 ‘바보 같은 사랑’ ‘굿바이 솔로’ 등에 잇달아 그를 캐스팅한 노희경 작가는 배종옥과 둘도 없는 친구 사이. 지난 92년 영화 ‘걸어서 하늘까지’를 끝으로 한동안 스크린을 떠나 있던 배종옥을 다시 영화로 돌아오게 한 ‘질투는 나의 힘’(2003)의 박찬옥 감독도 여자다.(배종옥은 97년 영화 ‘깊은 슬픔’에도 출연했지만, 이건 자신의 ‘본격적인’ 영화에서 제쳐놓는다)
“저를 좋아하는 팬도 남자보다 여자가 많은 것 같아요. 데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행복어사전’이라는 미니시리즈에서 여기자 역을 했는데, 당시만 해도 자기 생각을 분명히 말하는 여자 캐릭터가 드물던 때라 그 이미지가 오랫동안 제게 남아 있었죠.”
그는 이후 한동안 자신에게 비슷한 성격의 배역만 들어왔다고 말했다. ‘거짓말’이 성공하기 전까지 ‘멜로가 안되는 배우’로 그를 보는 시선도 적지 않았다고. 대신 그는 자의식 강한 여자 역을 도맡아 연기했다.
“현실에서도 저는 제 생각과 바람을 직선적으로 표현하고, 여자라는 이유로 한계가 정해지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편이에요. 그건 남자·여자의 문제를 떠나 저 자신을 존중하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죠. 제가 자의식이 강하다는 걸 처음 깨달은 건 중학교 3학년 때인데, 영어선생님이 수업 중에 ‘여자는 남자의 인형에 불과한 존재’라는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순간 저도 모르게 반감이 들면서 ‘왜 여자가 남자의 인형이야. 말도 안 돼’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걸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지만, 그 즈음 본격적으로 ‘나’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배종옥은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 인간의 가치를 절대적으로 생각하는 실존주의 철학에 빠져들었고, 사르트르와 시몬드 보부아르의 책을 많이 읽었다고 한다. 연기를 하게 된 것도 이 시기에 희곡을 읽으며 연극에 대한 관심을 키웠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저희 집이 보수적인 분위기여서 큰오빠는 제가 연극영화과에 가는 걸 많이 반대했어요. 그때 이미 결혼해 조카까지 있는, 제가 보기엔 ‘어른’이었는데 연영과에 가겠다고 하니 ‘사대 가서 선생님하다 시집이나 잘 가지 무슨 연극이냐’고 하더라고요. 그때 엄마가 ‘내 딸은 내가 알아서 키울 테니, 넌 네 딸이나 잘 키우라’며 딱 잘라서 제 편을 들어주셨죠(웃음). 돌아보면 우리 엄마가 참 멋있는 분이셨어요. 아버지 돌아가시고 혼자 6남매를 키우느라 힘이 많이 드셨을 텐데 한 번도 우리 앞에서 힘든 내색을 하신 적이 없고, 제가 이 길에 들어설 수 있게, 그 뒤엔 아무 걱정 없이 마음껏 일할 수 있게 든든한 방패가 돼주셨으니까요. 제가 자의식이 강하다면, 그건 엄마의 그런 씩씩하고 강한 모습이 제게도 전해진 덕분이겠죠.”

▼ Third keyword ; 낭·만
“내 삶을 이끌어가는 건 낭만, 사랑이 찾아온다면 마다하지 않을 거예요”

어느 여배우와도 대체될 수 없는 배종옥만의 독특한 분위기는 그의 이런 고집과 자의식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다. 배종옥이 남다른 건, 그 고집과 자의식의 바탕에 ‘낭만’이 있기 때문. 배종옥은 자신이 본질적으로 로맨티시스트라고 말한다.
“저를 잘 모르는 분들은 제가 굉장히 차가운 사람인 줄 알아요. 하지만 사실 전 뭔가를 잘 계산하는 스타일이 못 되거든요. 좋아하는 것을 할 때는 모든 걸 잊고 빠져들고, 그외의 부분에선 모르는 것 투성이고요. 작품을 선택할 때 배역의 비중보다 캐릭터를 보고, 시청률이 높을 것 같은 작품보다 제가 하고 싶은 작품을 하는 것도 다 낭만을 추구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도 지금껏 굶지 않고 계속 연기해올 수 있었으니 정말 행운이라고 생각해요(웃음).”
작품에 몰입하지 않으면 제대로 연기하지 못하는 성격인 탓에 한 번에 두 작품 이상 동시에 하는 법이 없는 배종옥은 지난 2005년 TV 단막극 ‘내가 살았던 집’을 찍느라 두 달간 그 작품에만 매달린 얘기를 들려줬다. 배역의 성격에 맞춰 숏커트를 하고, 다른 드라마와 영화 출연 제의도 다 거절했지만 작품을 찍는 동안 말할 수 없이 행복했다고. ‘내가 살았던 집’을 ‘거짓말’ ‘질투는 나의 힘’ 등과 함께 ‘내 인생 최고의 작품’ 가운데 하나로 꼽는 배종옥은 “다른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지 몰라도 나는 그 작품이 꼭 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의 이 ‘낭만주의’는 그해 ‘내가 살았던 집’으로 국제 TV 드라마 시상식인 골든체스트상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으며 뜻 깊은 보답을 받았다.
똑부러지는 배종옥과 낭만을 꿈꾸는 배종옥.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두 모습은 그의 안에서 자연스럽게 얽히며 오직 하나뿐인 ‘배종옥 스타일’을 만들어낸다. 그는 작품을 하는 동안에는 자신의 온 시간을 그것에만 쏟아부으며 철저히 계획적으로 살지만, 막이 내리면 훌쩍 아무 준비도 없이 여행을 떠난다고 한다. 미국 뉴욕이나 유럽의 어느 도시를 찾아 하루는 벤치에 앉아 오가는 이들을 바라보고, 다음 날은 한없이 길을 따라 걷기만 하는 여행을 즐기다 보면 또다시 새로운 일을 시작할 힘이 솟는다고. 집 안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혼자 음악을 듣고 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기는 것도 그가 낭만을 만끽하는 한 방법이다.
“사람을 여덟 가지 체질로 나눠 기질을 파악하는 ‘8체질’ 분류법이라는 게 있는데, 제가 그 가운데 ‘금양체질’에 속한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이 체질의 특징은 ‘남 앞에 나서지 않으며 창의적인 작업을 좋아하는 것’이라고 하더군요. 이 설명이 저를 정말 정확하게 표현하는 것 같아요. 제가 배우를 하는 건 남 앞에 나서거나 뭔가 과시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독특하고 창의적인 작업을 하고 싶어서니까요. 저는 평범한 가운데 뭔가 특별함이 느껴지는 순간을 만들고, 그걸 마음껏 즐기며 살고 싶어요. 그게 제가 생각하는 낭만이죠.”
“결혼할 생각은 없지만 사랑이 다가온다면 얼마든지…”라고 말하는 배종옥은 사랑에 관해서도 낭만주의자다. 지금까지 “사랑에 빠지면 늘 열정적으로, 진심을 다해 사랑했다”는 그는 “다시 사랑을 한다면 서로 편안하게 대화할 수 있는 사람, 만나면 행복하고 그 행복이 영원하기를 꿈꾸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하지만 제가 먼저 누군가를 찾아나서지는 않을 거예요. 지금 제 꿈은 삶이 다할 때까지 배우로 사는 것, 50대가 되고 60대가 돼도 개성 있는 역할을 맡을 수 있는, ‘배종옥이 연기한 작품을 보면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는 믿음을 주는 배우가 되는 거니까요. 그렇게 살아가다가 사랑이 다가오면 사랑도 하겠지만… 좋은 배우로 늙어가는 것,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낭만적이지 않나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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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동아 (2010년 4월호)
김명희 기자

방송작가 노희경, ‘거짓말’ 2라운드

98년 드라마 ‘거짓말’이 방영될 당시 시청률은 별로 높지 않았다. 하지만 노희경은 지금도 ‘거짓말’의 작가로 기억된다. 드라마 방영 당시 만들어진 동호회는 아직도 활발하게 활동 중이고 최근 이 드라마 대본집도 발간됐다. 정말 질긴 사랑이다.

“사랑을 하면서 강한 사람은 없어. 사랑을 하면 모두 약자야. 상대에게 연연하게 되니까. 그리워하게 되니까. 혼자서는 도저히 버텨지지 않으니까. 우린, 모두 약자야.”(드라마‘거짓말’ 중)

드라마의 미덕은 거기에 빠져드는 동안만큼은 세상 모든 시름을 잊는 데 있다. 흥미진진한 전개로 다음 회가 기대되는 드라마도 있지만 대부분 그 여운은 오래 지속되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지난 98년 20부작으로 방영된 노희경 작가(44)의 ‘거짓말’은 다른 드라마와 차별화된다. 드라마 속 대사는 지금 들어도 가슴 한쪽이 시려온다. 등장인물 주성우(배종옥) 서준희(이성재) 정은수(유호정) 세미(추상미) 동진(김상경) 장어(김태우)는 지금도 어디선가 뚜벅뚜벅 살아가며 가슴 따뜻한 사랑을 하고 있을 것 같다.
‘거짓말’은 국내 최초의 ‘마니아 드라마’로 기억된다. 당시 ‘거짓말’의 PC통신 동호회가 인터넷 커뮤니티로 발전해 지금까지 12년간 모임을 이어오고 있다. 강한 생명력을 지닌 이 드라마 대본집이 최근 발간됐다. 대본집 발간에 맞춰 노희경 작가를 만났다. ‘바보 같은 사랑’ ‘꽃보다 아름다워’ ‘그들이 사는 세상(이하 그사세)’등을 집필한 노 작가는 얼굴과 목소리만으로는 나이와 성별이 가늠되지 않는다. 짧은 커트머리에 굵고 앳된 목소리는 미소년을 연상시킨다. 그런데 말투는 딱 그의 드라마에 나오는 산전수전 다 겪은 할머니다. 때로는 담백하고, 때로는 끈적끈적한. 그래서 그의 별명이 ‘애늙은이’다.

‘거짓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참회록
‘거짓말’ 집필 당시 그는 서른두 살, 단막극 ‘세리와 수지’ ‘아직은 사랑할 시간’과 4부작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 ‘내가 사는 이유’ 등을 써낸 데뷔 3년 차 작가였다. “작가로서 출세해야겠다는 욕망과 불안감, 선불을 받았으니 반드시 글을 써야 한다는 부채감까지 겹쳐 글보다 악몽에 시달리는 시간이 많았던 시절”, 밥 먹는 시간도 아까워 환자용 캔죽을 쌓아놓고 글을 쓰는 사이 몸무게가 32kg까지 줄었다. 그는 지하 방 한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내가 왜 글을 쓰지?’ ‘글에 몰려 살아가는 나는 행복한가’ 묻고 또 물었다. 그러다 생각해낸 것이 ‘거짓말’이었다고 한다. 이 드라마는 유부남인 준희와 선배 성우의 운명적인 사랑, 이들의 사랑 앞에 좌절하는 준희 아내 은수의 이야기가 중심 축이다. 불륜이지만 운명같은 준희와 성우의 사랑, 남편을 향한 은수의 외사랑… 어느 누구만을 비난할 수도, 애정을 쏟을 수도 없었다. 작가는 여기에 현철과 영희의 노년 사랑, 가진 자 동진의 못 가진 자 세미에 대한 연민까지 곁들여 진정한 사랑의 의미를 깊이 있게 조명한다.

“‘거짓말’은 지나간 사랑에 대한 참회록이에요. 왜 나와, 나와 사랑했던 상대들은 그렇게 모질고 극악하게 이별해야만 했던 것일까. 한번쯤은 ‘미안하다’ ‘잘못했다’라고 말했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질문이 ‘거짓말’을 쓰게 한 최초의 힘이에요.”
작가에 따르면 ‘거짓말’은 ‘거짓말처럼 아름다운 사랑’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내가 아름답지 못한 사랑을 했기에 그 이야기를 작품에 담아내고 싶었다”는 것.
“사람들은 이 드라마가 아프다고 하더군요. 아픔으로 지난 사랑을 참회할 수 있을까. 지금 누군가가 그렇게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라고 할 거예요. 그런데 그때는 그만한 것이라도 내게는 위안이 됐어요. ‘내가 아프니까 지나간 모든 사랑아 날 용서하렴’ 이라며 치졸하게 매달렸죠.”

- 드라마 방영 12년 만에 대본집이 발간됐는데 소감은.
“드라마 집필 당시 밥을 잘 못 먹어 몸무게가 32kg 정도 나갔어요. 주변 사람들이 죽을 것 같다고 다들 쓰지 말라고 말렸죠. 대본집을 읽는데 그때 생각이 나 마음이 짠했어요. 지금은 37, 38kg 나가는데 이 정도가 딱 좋아요. 개개인의 캐릭터에 빠지다 보니 끈적끈적하며 장면이 넘어가는 속도와 대사 등이 정제되지 않아 창피한 점도 있지만 ‘젊은 날이 아니면 언제 사랑에 미쳐보나’라는 생각이 들어 가끔 그립기도 하고….”

- PC통신 동호회에서 시작한 ‘거짓말 동호회’가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습니다.
“처음엔 곧 없어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10년 넘게 지속되는 걸 보니 ‘이 사람들도 나처럼 훌훌 털어버리지 못하는 성격이구나’란 생각이 들더군요. 새로 들어오는 사람들 보면 신기하기도 하고요.”

- 지금까지 많은 작품을 썼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작품이나 캐릭터는.
“예전에 사귄 사람은 더러 잊기도 하는데 작품은 다 기억해요. 좋아했던 연출자·배우도 있고 정이 가는 에피소드도 있고…. 특히 배우들은 고생을 많이 하니까 다 기억이 나요. 그중에서도 ‘거짓말’의 성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인희(나문희), ‘내가 사는 이유’의 숙자(나문희), 젊은 친구들 중에는 ‘그사세’의 송혜교씨가 기억에 남아요. 열심히 해서.”

- 송혜교씨는 ‘그사세’에 함께 출연한 현빈씨와 연인이 됐습니다. ‘화려한 시절’의 공효진·류승범씨도 실제 커플로 발전했는데. 예상했나요.
“예상은 전혀 못했는데 그런 걸 보면 재밌어요. 그들을 따로따로 섭외했으니까. 처음 만나 ‘안녕하세요. 누구누굽니다’하며 인사하는 것을 봤으니 상견례 자리에 함께한 셈이 됐어요. 들리는 풍문에 ‘애인 있는 사람은 노희경 작품에 출연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있더라고요(웃음).”

- 배우들과도 친하게 지내죠.
“친분은 대개 작품에서만으로 그쳐요. 대신 작품 속에서 끊임없이 보죠. 배종옥씨 경우는 ‘거짓말’을 찍을 당시 늙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젊었더라고요. 요즘 또 보면 어떨지 모르겠네요(웃음).”

- 실제 배우를 염두에 두고 드라마를 쓴 적이 있나요.
“네. 매번 그래요. 장동건이 캐스팅되든 안 되든 특정 배우를 염두에 두고 쓰면 편해요. ‘거짓말’의 성우는 배종옥씨를 생각하고 쓴 게 아니었어요. 방영 한 달 앞두고 배종옥씨가 캐스팅되는 바람에 말투를 그에 맞게 다 바꿨죠. 유호정씨는 실제로 말끝을 올리는 버릇이 있었는데 그것을 고스란히 따가지고 대본을 썼고요.”

- 그럼 성우는 누구를 염두에 두고 쓴 건가요.
“이런 거 말해도 되나?(웃음) 황신혜씨였어요. 그때 인기가 최고였으니까. 황신혜씨가 (캐스팅이) 안 돼서 배종옥씨한테 넘어갔는데 그전까지는 도시적인 커리어우먼만 연기했지, 사랑 연기를 한 번도 안 해봤다고 하더라고요. 드라마에서 한 번도 운 적이 없다고, 안약 쓰면 안 되겠냐고 해서 안 된다고 했더니 황망해하더라고요. 나중엔 너무 많이 울어 머리가 아프다고 했고요.”

각박한 세상, 맑은 된장국처럼 순한 드라마 쓰고 싶어

“(시청률은 별로였지만) 나는 ‘거짓말’로 참 많은 것을 얻었다. 영원한 파트너 표민수를 얻었고 정말 따뜻한 동료 기민수(당시 조연출, 드라마 ‘굿바이 솔로’ PD)를 얻었고 절친 배종옥을 얻었다. 집필부터 방영까지 1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만큼 얻었으면 나는 마음 부자가 아닌가 싶다. 그러나 지난 사랑에 대한 참회는 내게 여전히, 숙제다.”(노희경)
노희경 작가는 어릴 때부터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고 서울예술대학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원래는 시와 소설을 썼으나 머리가 아팠고 드라마를 쓰고부터 자유로워졌다고 한다. 그의 작품에는 인간과 사랑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관통해 흐른다. 그래서 ‘노희경표 드라마’라는, 별칭도 생겼다. 하지만 시청률은 작가의 명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망한 드라마도 없지만 대박을 터뜨린 작품도 드물다. 2008년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를 낼 당시 그는 출판사에 “나는 시청률이 안 나오는 작가다. 책이 안 팔려 출판사에 민폐 끼치기 싫다”면서 초판을 3천 부밖에 못 찍게 했다. 그러나 당시 출판사는 작가 몰래 초판을 5만 부 찍었고 40만 부나 팔려나갔다. 그는 “내 드라마가 마니아 드라마라고 하는데 마니아들은 모두 어디 숨어 있는지 궁금하다”며 웃었다.

- 사람들은 노희경 작가의 작품을 묶어 ‘노희경표 드라마’라고 합니다. ‘노희경표 드라마’가 도대체 뭔가요?
“저도 모르겠어요. 저는 마니아 드라마를 쓸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어요. 저도 시청률이 잘 나오면 좋겠어요. 물건을 팔려고 만들어서 내놨는데 안 팔리면 속상하죠. ‘거짓말’ 이후 ‘바보 같은 사랑’을 할 때는 작품이 나빠졌다느니 하는 말을 들을까봐 이름을 바꾸려고 했어요. 노경희나 이경희로(웃음). 그런데 드라마국장이 ‘어차피 파고들면 다 알게 된다’고 말해 실명으로 갔어요. 지금은 뭐라고 하든지 상관 안 해요. ‘노희경표’라는 말을 들으면 ‘나는 계속 새로운 걸 쓰는데 만날 똑같다’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고, 또 어떨 때는 좋게 들리기도 해요.”

‘거짓말’ 대본집을 다시 보며 고통스럽게 드라마를 집필하던 때가 생각나 마음이 짠했다는 노희경 작가.

- ‘막장’이라 불리는 드라마에 대한 생각은.
“‘막장’이란 말은 누가 만들었는지 참 재미있어요. 옛날에는 머리가 아파 그런 드라마를 안 봤는데 최근 공부 삼아 보니 욕 몇 번 하면 시간이 금방 가서 재미있더라고요. 그런 드라마를 보면 제가 팬서비스가 모자라다는 생각도 들지만 각박한 세상에 맑은 된장국 같은 순한 드라마를 쓰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글 쓸 때 자신을 믿는 편인가요.
“울며불며 가는 거죠. 지난해 처음으로 18km를 걸어봤는데 걷는 동안 내가 여길 왜 왔나. 욕도 했지만 가기로 한 거니까 가게 되더라고요. 사람이 어떻게 시종일관 자신을 믿거나 불신하겠어요. ‘시청률이야 어떻든 나는 엔딩을 쓴다’ 이런 마음으로…(웃음). 직장생활, 사회생활 다 그렇잖아요.”

- 방송작가는 화면을 위해 존재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그에 따른 아쉬움은 없나요.
“방송대본은 화면으로 봐야 되는 것이기 때문에 엄밀히 따지만 그것 자체로 작품은 아니죠. 그래서 도리어 배포가 커지는 것 같아요. 내가 쓴 작품을 연출자와 배우가 어떻게 색칠해줄까, 기대도 되고.”

- 소설을 쓸 생각은 없나요?
“전혀 생각이 없다가 요즘은 ‘나이 들어 일거리가 없으면 혼자 앉아서 시나 산문을 쓰는 것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더라고요. 하지만 지금은 드라마 대본을 쓰는 게 더 재밌어요. 글은 제가 아무리 잘 써도 맛이 잘 안 나는데 어른(배우)이 연기를 하면 향기가 나요. 내가 그들을 위한 바탕을 만들어주는 게 무척 기뻐요.”

- 소설가나 시인에 비해 방송작가가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경향이 있었죠. 내가 하는 장르를 남이 업신여긴다면 누구라도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반면 그래서 드라마 작가는 겸손한 직업이라는 생각도 들어요. 저는 나중에 소설로 ‘빵 터진다’고 해도 묘비에는 드라마 작가라고 쓰고 싶어요(웃음).”

“좋아하는 것을 할 수 있어 행복해요”

노희경 작가는 인터뷰 중 “기분 좋다” “재미있다”는 말을 많이 했다. ‘거짓말’로 아픈 상처를 드러낸 후 ‘굿바이 솔로’ ‘그사세’ 등에서 그는 이전보다 조금 밝고 경쾌한 모습을 보였다. 지금 노희경 드라마 특유의, 선한 어른들이 등장하는 가족 드라마를 집필 중인 그는 글 쓰는 틈틈이 국제구호단체 JTS홍보대사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번 대본집 발간을 통해 발생하는 인세와 수익도 JTS, 평화재단 등에 기부하기로 했다.
요즘 그의 주요한 일과 중 하나는‘어느 지역에 뭐가 얼마큼 모자라니 뭘 더 보내야 한다’는 걸 계획하고 계산하는 일이다. 숫자놀음은 젬병이라 머리가 아프지만 글쓰기만큼이나 재미있다고 한다.

- 작품 아이디어는 어디서 얻나요.
“‘지난번에 내가 어떻게 했나’를 생각하며 극복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가장 많은 아이디어를 얻어요. 주변 사람들이 모니터링하면서 ‘이건 재미없어, 이건 좋아요’하는 데이터들을 흘려듣지 않고 모으는 편이죠.”

- 전작 ‘그사세’로 부터는 어떤 것을 극복하고 싶나요.
“템포감도 빠르고 전문용어가 많아 보는 사람들이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제 드라마를 좋아하는 분들은 서민과 어른들 얘기를 좋아하는데 ‘그사세’에선 빠진 부분이기도 하죠. 이번 드라마는 신세대와 구세대가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할머니 얘기를 쓸 때면 ‘문씨 아저씨 앉아 있다’ ‘할머니 상추 뜯는다’ 같은 사소한 지문에도 기분이 좋아져요. 좋아하는 것을 충분히 쓸 수 있어서 기분 좋고요.”

- 인간 노희경을 가장 닮은 드라마 속 캐릭터는 누군가요.
“많은 캐릭터가 있었고 캐릭터는 작가와 분리될 수 없어요. 그래도 한 캐릭터를 꼽아야 한다면 ‘내가 사는 이유’의 욕쟁이 할머니(김영옥)를 꼽고 싶어요. 입만 열면 독하지만 귀여운(웃음).”